P. 6
나는 자꾸만 복도를 뒤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진짜 할 수 있겠어요?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어요.”
아저씨의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할까 말까 할 때는 일단 해 보는 거다.
P. 17
“선생님은 이미 기준이가 병원 다니는 걸 알고 계셨어. 힘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셨는데 기준이가 비밀로 해달라더라? 뭔가 수상해. 기준이 여행 다녀온 뒤로 이상했잖아. 혹시 말 못 할 병이 아닐까?”
P. 38
아저씨가 칭찬을 늘어놓았다. 첫 번째 감정 헌혈에 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피를 뽑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화난 일을 떠올려도 미안하거나 서운한 감정, 때로는 사랑하는 마음이 섞여 있으니까.
P. 49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따뜻한 눈을 보자 다 털어놓고 싶었다. 사실은 화가 안 나는 게 아니라, 화를 낼 수 없다고 말이다. 과연 믿어 주실까? 오히려 일이 커질 게 뻔하다. 병원에 찾아가 우리
손주 감정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실 테니까.
P. 75
기준이는 이상한 말만 남기고 화장실을 나가 버렸다. 뭘 조심하라는 걸까? 설마 감정이 돌아오지 않는 건가? 기준이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내가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P. 84
우리 셋은 벽에 바짝 붙어 안을 훔쳐보았다. 그런데 방안은 빨강, 초록, 보라, 노랑, 분홍,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했다. 영롱한 광채에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P. 93
“사람은 감정만으로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요. 용기 군이 감정 헌혈하면서 감정을 느낀 순간을 떠올린 것처럼요. 분노를 주입하는 순간 자신이 화가 났던 때로 되돌아가는 거죠. 감정 치료는 그때로 돌아가 소화하지 못한 감정을 풀어 줘요.”
P. 109
기준이의 비밀을 알아냈어. 내일 아침 10시, 할머니 병원 앞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