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1 혹시 이런 경험이 있나요?
① ‘문을 잠갔나?’, ‘가스 불을 껐나?’ 갑자기 불안해져 집에 돌아가 확인했다.
② 숫자 4나 9에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껴서 피한 적이 있다.
③ 손이 세균에 오염된 것 같아서 꼼꼼하게 닦았다.
④ 책장에 세워놓은 책의 높이가 안 맞는 게 신경 쓰여서 다시 정리했다.
⑤ 노트에 적은 글자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우고 다시 썼다.
이것들은 모두 정상적인 심리입니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맞아, 맞아.” 하면서 공감할지도 모르지요.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리 속에 강박의 싹이 숨어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P72 한번 불안이 생기면 행동해서 해소할 것이냐, 아무것도 하지않고 참을 것이냐 두 갈래 길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이 강렬하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가시밭길입니다. 그런데 불안이 생기기 전에 도망칠 수 있습니다. 불안해지는 조건은 대부분 정해져 있고,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관련된 장소를 피하면 불안해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회피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부딪혀서 다치게 할까 봐 불안해 아이들이 많은 장소를 피합니다. 등하교 시간에는 초등학교 주변을 피합니다. 백화점이나 가족 손님이 많은 가게도 피합니다. 전철역도 시간대에 따라 아이가 많으니 피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갈 수 있는 장소가 점점 줄어듭니다.
하지만 불안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릅니다. 아니, 오히려 피하면 피할수록 두려움이 커지고, 불안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어디로 도망치든 결국 불안의 대상을 발견하고 맙니다. 아이가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 장소가 얼마나 있을까요? 절대적 안전을 추구하면 행동 범위는 점점 좁아집니다.
훨씬 자주 겪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과 사뭇 다른 삶을 체험한다.
P104 이렇듯 다양한 불안 강도를 수치화합니다. 알아보기만 쉽다면 어떻게 해도 상관없지만 보통 0에서 100까지 순서대로 늘어놓은 표를 만듭니다. 참고로 당시 저의 불안 계층표를 보여드리겠습니다(알기 쉽게 조금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대충해도 괜찮아요. 중간에 순서를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만들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증상의 전체적인 모습을 표 형태로 시각화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불안 계층표를 참고로 치료자와 상담하면서 CBT 과제를 정합니다. 표 아래쪽에 있는 약한 불안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등산에 비유하자면 1부 능선부터 제대로 확실히 올라가는 것입니다. 계속 승리를 거두면 자신감이 붙습니다. 이기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승리가 계속되면 인지왜곡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P169 초반에는 원칙 중에 ‘끌어들이지 않는다’를 철저히 지키기가 어려웠습니다. 불안을 참지 못하고 종종 아내에게 보증을 요구했습니다. “콘센트가 불타고 있지는 않지?”, “내가 플랫폼에 사람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지?” CBT 전에는 끌어들임이 일상이었기에 단번에 없애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때 주치의 선생님께 대응 방법을 배운 아내의 협조가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질문이 병적인 보증 요구임을 꿰뚫어보고, 매번 침착하게 대응했지요. “괜찮아! 이제 끝!” 하는 식으로 일정한 안심만 제공하고, 그 이상은 절대 대답하지 않습니다. 저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더는 보증을 요구하지 않았지요. 아내의 대응은 효과가 있어서 끌어들임이 서서히 줄었습니다.
P202 이 유형의 특징은 ① 강박사고의 개입이 눈에 띄지 않고, ② 유전적 요소가 비교적 강하며, ③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경향이 있고, 4) 틱과 함께 나타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정리정돈 강박을 다른 유형과 감별하는 것은 치료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약물을 선택하는 데 참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항우울증약에 더해 항정신병약을 투여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따라서 틱이 있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리정돈 강박은 다른 유형에 비해 자아 친화성이 강합니다. 자아 친화성이란 이름대로 증상이 자아에 친화적이란 뜻입니다. 즉 강박행동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않고, 하고 싶어서 하는 일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정리정돈 강박이 완벽주의적인 성격의 연장선에서 나타나기 쉽다는 사실에도 기인합니다. 그렇다면 강박행동 그 자체는 그다지 힘들게 느끼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큰 곤란을 겪습니다.
P253 강박장애 환자의 가족은 하나같이 지쳐 있습니다. 끌어들임으로 인한 소모가 실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강요하는 행위나 규칙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말에 영문도 모른 채 휘둘리다 보면 화가 납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에게까지 화가 납니다.
환자 입장도 비슷합니다.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거지?’ 하는 불만이 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사 온 물건을 냉장고에 넣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 세균을 없애야 한다’라는 강박행동의 배경에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을 감염에서 지키고 싶다’라는 강한 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어쩌면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가족을 지킨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필사적인 마음이 전혀 전달되지 않고, 가족들이 자신에게 감사하지도 않으니 엄청난 스트레스와 슬픔을 느낍니다.
이런 시각 차이 때문에 가족 사이가 틀어집니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환자의 마음속에서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 ‘가족이 이 모양이니까 도움을 받지 못한다’라는 오해가 생기고,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절망적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P283 좋은 주치의나 임상심리사, 약물요법, 더 유망한 약물, 가족의 든든한 지원은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국 강박장애 치료를 성공시키고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자신입니다. 스스로 병을 제대로 알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올바른 행동을 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독하고 가혹한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 불안에 압도당하고, 치료에 실패하기도 하겠지요. 거의 포기한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일어섰으면 좋겠습니다.
강박 환자는 모든 상황을 이분법적으로, 0이냐 100이냐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한 번 실패하면 ‘또 0부터 시작이군’, ‘이제 틀렸어’하며 실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성장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연한 사고방식과 강인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증상을 분석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치료 전략을 짜봅시다. 치유로 이어지는 방법은 분명 남아있을 겁니다.
이 책에서는 일관되게 강박장애를 이기기 위한 지식에 관해 기술했습니다. 지식은 무기입니다. 무기는 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무기가 당신의 싸움에 도움이 되어 강박에 승리하고 자유를 손에 넣기를, 그리고 가족 모두 진정한 건강을 회복해 행복한 삶을 되찾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