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백승휘 단편소설집에 붙여
이종진 브니엘고등학교장
사람살이에서 푯대로 삼아야 할 핵심 가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맹자의 《고자장구(告子章句)》 상편 제11장 "孟子曰 仁 人心也 義 人路也."라 답하리라.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그렇다. 심성은 자애로움을 잃지 않아야 하고 발걸음은 의로움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둘은 새의 좌우 날개와 같다. 인이 없는 의는 차가우며 의가 없는 인은 맹목적이다. 인은 의를 그릇으로 삼고, 의는 인을 내용으로 삼아 합일(合一)된 완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백승휘 작가의 삶이 그렇다. 사회 구조적 억압과 폭력에 무기력하게 노출된 민(民)을 한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끌어안으며,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는 냉소로 외면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의분(義憤)으로 맞선다. 시시포스의 무한반복의 노동 형벌 같은 바위 밀어 올리기라 할지라도 바위를 지탱하는 고통이 실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질 때, 오히려 살아있음을 획득한다. 작가의 작품 세계는 그의 삶의 투영이리라. 단편소설집 『그녀도 사랑했으리』에서도 작가는 이 시선을 놓지 않는다.
목마름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삶의 현장에서 한 됫박 한 됫박 퍼담은 작품의 소재들은 우리네 삶의 펄떡거리는 현실태다. 작가의 소설 묶음은 아무것도 아닌 길에서 쇠락한 나뭇잎을 같이 밟는 지인이 던져준 한마디에서, 초겨울 한밤중 물대포를 쏘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경찰에 대한 분개에서, 우연히 들어선 골목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며 팔목을 잡는 여자를 만났을 때 떠올린 시 한 편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단편소설 「골분」은 고향으로라도 꺼릴 화장막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삶의 경계보다 오히려 죽음의 경계에 더 익숙한 화장터 마을 예감동에서 개를 잡으며 살아가는 주인공 땅개의 삶을 중심으로 일상 속의 ‘소외’, ‘폭력’, ‘죽음’의 문제들을 들추어낸다. 땅개를 두려워하면서도 억압하고 소외시키며,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이웃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고향에 살고 있으나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들의 초상이다. 작가는 폭력에 무방비적으로 당했던 개를 등장시켜 예전 땅개가 머물렀던 화장막 시체를 파헤치는 장면을 묘사하며 이야기를 맺는다.
인간의 폭력을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개를 통해 인간 폭력의 실상을 고발한다. 폭력의 정체는 죽음으로도 묻을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뜬장」의 두 주인공은 도살꾼 ‘도장만’과 개(犬) ‘덕구’다. 비릿한 죽음을 팔아 욕망을 영위하려는 인간 도장만, 뜬장에 갇혀 한 올 삶의 끈을 겨우 붙잡고 있는 개 덕구! 둘은 뜬장 쇠창살의 안팎을 경계로 죽임을 벼르는 관계다. 도장만은 전기도살법까지 동원하여 집요하게 덕구를 도살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도망쳤던 덕구가 다시 돌아온다. 덕구는 도장만이 태평댁과 한바탕 욕정을 채우던 그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정사의 절정에서 덕구를 발견한 태평댁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도장만은 도마 위 칼을 집어 들고 덕구를 쫓는다. 이미 덕구에게 정신을 빼앗긴 도장만은 어느새 대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버리고, 결국 덕구에게 죽임을 당한다. 도장만이 최후를 맞이했던 그 대숲은, 공교롭게도 도장만이 개들을 도살할 때, 개들의 울부짖는 소리조차 내보내지 않았던 곳이다.
뜬장 쇠창살 안팎을 경계로 대립하고 있는 도장만과 덕구의 구도는 우리 사회 곳곳에 내재화 되어있는 폭력의 구조다. ‘죽임과 죽음’조차 무감(無感)하게 처리해 버리는 사회에서 공동체적 자아를 갈구하는 생명들의 존재론적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그녀도 사랑했으리」는 개포천 도축장을 무대로, 한때 도축꾼이었던 태만이와 고기탕국집 곰보댁의 사랑 이야기다. 소를 도축해서 생존을 잇던 태만이는 어느 순간 자기 직업에 회의와 염증을 느껴 도축장을 떠난다. 도시에 들어가 날품팔이 장사도 해 보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다. 그러다가 무엇에 이끌렸는지 개포천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를 남몰래 짝사랑했던 곰보댁과 눈이 맞아 둘은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태만은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처지에 몰린다. 태만을 떠나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곰보댁은 반년밖에 안 된 사랑이었지만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애써 모은 전 재산을 내어준다. 시간이 흐른 후 택시를 몰던 태만이가 다시 그곳엘 가보지만, 그곳엔 도축장도, 도축장을 의지해 살던 자들도, 곰보댁도 없다.
곰보댁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삶들의 외로움’, ‘사랑에 대한 갈망과 한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오롯이 감내해야 할 ‘고독한 자기 치유’ 그 자체다. 그래도 용광로 뜨거운 불 속에서도 녹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단단해 질대로 단단해져 빛을 발하는 정금 같은 ‘사랑’은 남겼으니! 텅 빈 개포천에 충만한 사랑은 남겼으니!
「완벽한 그림」, 「십계」에서도 작가는 「골분」, 「뜬장」, 「그녀도 사랑했으리」에서의 문제의식을 계속 붙들고 탐색한다. 작가의 시선은 힘의 바깥으로 내쫓긴 비주류 존재들의 아픔을 멈추지 않고 응시한다.
낯선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시켜서라도 최소한의 삶을 갈망하지만, 남자란 수컷의 폭력을 정면에서 맞받아치면서 결국에는 살인까지 이르는 주인공 ‘화사’. 화사의 삶의 희망을 폭력으로 꺾으려는 전주(錢主) ‘배도라치’, 유곽촌을 장악하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밤의 늑대 ‘마 사장’. 이들의 관계는 ‘죽임과 죽음’으로 종말을 맞는다. 결말의 비극적 장치는 눈감으므로 외면할 수 없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한다.
「완벽한 그림」에서 순멍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성숙한 여인의 살냄새 앞에서도 육체적 탐닉을 영혼의 타락으로 여길 만큼 가난하고 순진한 예술가다. 화사의 살인을 자기의 살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돈까지 쥐여주며 화사를 섬에서 탈출시킨 순진한 멍청이다. 섬을 빠져나온 화사가 꽃무늬 스웨터 옷 뒤에 숨어 웃음 짓는 것도 모르는!
화사의 ‘완벽한 그림’ 속에 수단적 존재로 전락하는 순멍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편하다. 순진함이 순수함으로 긍정 받지 못하고, 가볍게 처리되거나 이용당하는 모습에서 인간사회의 단면을 본다. 우리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외된 인간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섬에서 탈출한 주인공 화사의 이야기는 「십계」로 이어진다. 화사가 흘러 들어간 도시는 자본과 성(性)에 포획된 군상들의 질펀한 욕망이 춤을 추고, 먹이사슬 정점의 마 사장이 힘없는 유곽촌 여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공간이다. 유곽촌의 상(商)도덕인 십계(十誡)가 유명무실해지고, 화사를 향한 마 사장의 폭압이 정점으로 치달을 즈음, 열(十) 층 계단 십계 위쪽 홍등가와 아래쪽 여인숙 촌 간 화대 금액 기준의 우스꽝스러운 계급 의식은 연대 의식으로 바뀐다. 여자들의 눈빛은 마 사장을 향하고 마 사장은 난바다 한가운데에서 화사에게 죽임을 당한다.
화사, 유곽촌 여성들과 함께 주목할 인물 하나는 목사라는 사내다. 목사는 판자때기로 얽은 문에 십자가마저 없었다면 넝마주이 집으로도 착각할 만한 교회를 그곳에 세우고 여자들의 생리대를 수거하고, 세탁하고, 다시 나눠주는 일을 한다. 유곽촌 여성들에게 성자(성이 잠자는,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목사)라는 조어로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녀들이 품속에서 한 번도 꺼내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있을 만큼 믿음의 존재가 되어간다. 사내의 그런 모습을 화사는 주의 깊게 바라보았고, 사내는 화사가 마 사장을 죽이던 날 한 척의 배를 끌고 화사에게로 향한다. 신에게 맺을 종신 서약을 화사에게 맺고 두 사람은 멀리 떠나간다.
「십계」의 활자 이면에는 자본의 욕망을 좇아 도회지 목 좋은 곳에 고상한 사람들만 상대하겠다는 예수 없는 현실 교회도 오버랩되고, 범속함에서 성스러움이 출현한다는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의 성(聖)과 속(俗)의 변증법도 지나가고, 진흙탕 속에서 피는 연꽃도 숨겨져 있다.
「비나리」는 7, 80년대 한국 사회의 생경하지 않은 가족 이야기다. 여자에게는 바람 난 남편조차도 ‘남자는 버릴 순 있어도 가족을 먹여 살릴 지아비는 버릴 수 없는’ 그런 존재다. 남편 맘을 채간 여자에게도 버림받은 남편을 거둬들이지만 이내 죽고 만다. 사내자식들은 무정하고, 집구석에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까 해서 낳은 딸은 덜떨어진 팔푼이다. 딸 ‘미숙’은 가족들에게도 죽이고 싶도록 미운 존재다. 상습적 폭력의 대상이다. 미숙을 모질게 대하는 아들 민수에게서 살기 띤 눈을 본 후부터 여자는 전전긍긍한다. 마침내는 마을 사람들까지 속인 후, 미숙을 산 넘어 사는 떠돌이 굴젓눈이에게 돈과 함께 멀리 딸려 보낸다. 여자는 북받치는 감정에 서럽게 운다. 그저 죽지 말고 살아 있기만을 바라는 어미의 마지막 비나리였다.
인간 사이에는 핏줄 인연으로도 건너기 힘든 고독의 강이라는 것이 흐르는 것은 아닐까? 여자도, 남편도, 사내자식들도, 딸 미숙도 파편화된 개인을 넘지 못한다. 그래도 작가는 한 줄기 희망을 심는다. 시작은 마을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배 아파 낳은 자식을 향한 어미의 마지막 비나리. 사랑의 눈물이다.
「명암방죽」은 공권력의 민간인 학살, 그 폭력의 기저에 숨겨진 사회 구조적 모순을 가슴 아프게 그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순사보, 6·25 때는 명암리 보도연맹원 학살의 주범이었던 천 서장은 방죽에 빠져 죽은 아들의 죽음조차 날조하여 자신의 성공 발판으로 삼는 공권력의 상징체다.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죽은 아내의 무덤을 딸과 함께 찾았다가 방죽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소설 속 거지는 ‘공비’로 조작되고, 아비를 억울하게 잃은 딸마저 반 실성한 채로 명암방죽에 빠져 죽는다. 권력의 부조리와 폭력은 강고하나 맞서는 소시민은 무력하다. 억압적 권력 구조의 벽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과 무력함을 안고 슬픈 죽음에 대한 위로만 건넬 뿐이다. 진실은 덮여 버리고 죽음은 멈추지 않는다. 반복되는 비극은 민주주의를 살고 있는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인아(人痾)」는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일방적 성(性) 정체성만을 고집하는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중학교 사춘기에 만난 두 남자 ‘동수’와 ‘정희’, 학창 시절 동수는 정희가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도와주고, 정희는 그런 동수를 좋아한다. 두 사람의 이성 관계는 성인까지 이어진다. 군 문제 앞에 놓인 정희는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면서도 군에 입대하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정희는 자살하기 전 동수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성소수자의 쓸쓸한 외로움이 짙게 밴 편지글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작가는 정희의 죽음을 통해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사회 제도와 규범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고발한다. 다름을 차별의 근거로 삼거나 다수가 소수를 배제하는 공동체는 위태롭다. 현 한국 사회의 ‘차별금지법’ 갈등 문제를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문(門)」은 학교라는 공간에 내재화되어 있는 ‘권력 구조와 지배적 힘의 작동 방식, 헤게모니 갈등’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소설은 공개되고 공인된 권력인 선도부와 음지에서 물리적 힘을 극대화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꼴통 서클을 두 축으로 하여 전개된다. 두 세력 간의 공생, 적절한 견제, 가차 없는 공격 등의 옵션은 우리 사회에서 힘을 가진 집단들의 행동 매커니즘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야기를 무겁고 팽팽한 긴장감으로만 끌고 가지 않고 봉근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갈등 상황을 해소하는 이야기 구성과 전개 방식은 이 소설에서 맛볼 수 있는 묘미다. 작가의 힘이 빛나는 부분이다.
아홉 단편의 저류(底流)에는 ‘소외’와 ‘폭력’이라는 주제가 공통으로 흐르고 있다. 소외를 주체와 객체 혹은 목적과 수단의 전도(顚倒)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작가는 아홉 단편에서 존재들의 다양한 소외 형식들을 다루면서 소외 문제의 필연적 귀착점으로서 물리적·정치적·사회문화적 폭력의 문제, 최정점인 ‘죽임과 죽음’의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고발한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일찍이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에서 〈‘나’와 ‘그것’의 관계〉와 〈‘나’와 ‘너’의 관계〉의 문제를 고찰했다. 전자는 주체와 객체의 수직적 관계이며, 후자는 주체와 주체의 수평적 상호작용의 관계이다. ‘그것’은 주체가 선택하고, 통제하고, 소비할 수 있는 수단적 대상에 머물지만 ‘너’라는 것은 자율적이고, 인격적이며, 목적적 존재로서의 주체이다. 우리는 나 아닌 존재들과의 관계 맺음에서 ‘그것’으로 만날 것인지, 아니면 ‘너’로 만나야 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작가도 이 물음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 말 쓰임새의 풍부함과 문장의 빼어남, 작가의 주제 의식에 감탄한다. 전작 『대금 소리』에서의 작가의 고백에서 일말의 답을 찾았다.
“글은 오십 초반부터 썼다. 딱히 문학을 배운 적도 없고 글쓰기 수업을 받아 본 적도 없다. 30년을 노동판에 깊숙이 뿌리박고 살았다. 열두 시간을 꼬박 공장에 박혀 숨 가쁜 노동을 하면서도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통근 버스를 타기 위해 30분을 걸어가면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30분 후면 도착할 통근 버스 안에서 글을 썼다.”
정식으로 문학을 배우지도 않았고, 오십을 넘겨 글을 쓰기 시작해 창작한 작품들이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작가가 노동자의 삶에서 체화(體化)한 ‘나와 나 아닌 존재들과의 관계 맺음에 대한 체험적 통찰’과 거기서 건져 올린 ‘사회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작가의 삶은 치열하고 고달팠지만, 독자들은 그 부피와 질량에 비례하는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한껏 책 읽기의 행복을 누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