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등단한 이래, 서성란만큼 한국 사회의 약자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 작가도 드물다. 소설집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약자로는 이주노동자와 해외 입양아를 들 수 있다.
「피아라 식당의 손님」은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네팔에서 온 버랄은 네 개의 손가락이 프레스에 잘린 채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서성란은 이 작품에서도 버랄의 ‘고통’에만 주목해 그를 타자로 고정시키는 표상의 폭력에 머물지는 않는다. 버랄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무수한 유사성의 회로를 창출하고 있는데, 그 회로는 ‘버랄=경섭’, ‘버랄=영석’, ‘버랄=지하철 기관사’의 등식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와 한국인의 유사성만 주장한다면, 그것은 ‘낭만적 허위’에 머물 수도 있다. 서성란은 이러한 측면 역시 놓치지 않으며, 작품에는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한 외국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줄 신분증”이 없어 “유령”이 될 수밖에 없지만, 경섭의 주머니에는 설령 자신이 주검으로 발견되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줄 신분증”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또한 경섭의 아들 영석은 네팔에서 일한다고 해도,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청년들과는 다르게 “월급을 받으면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하고 몽땅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에게 보내야 하는 고달픈 신세가 아니”며, “강제 단속에 마음 졸이고 몸이 아파도 작업장으로 출근해야 하는 불법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영석은 원한다면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자유인”이다. 이처럼 이주노동자와 한국인은 분명 같지만, 분명 다르기도 하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같음과 다름’ 혹은 ‘다름과 같음’이 충분히 사유될 때만, 이주민과의 공존은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서성란이 새롭게 발견한 약자는 해외 입양아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이들을 해외로 보냈던 불명예를 안고 있는 나라이다. 현재 많은 해외 입양아들이 어른이 되어 한국 사회로 돌아오고 있으며, 서성란은 이를 날카롭게 포착하여 작품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규호 노먼 테리어」와 「존, 로베르트, 은희」는 해외 입양아들의 문제에 대한 서성란의 뜨거운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존, 로베르트, 은희」에서는 해외 입양아 출신의 존 데이비드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하려는 강렬한 태도가 일정 부분 드러난다. 「존, 로베르트, 은희」의 존 데이비드는 우편 주문 아이였다. 입양기관이 양부모를 대신해 받는 IR-4 비자는 양부모가 한국으로 와서 입양 절차를 완료하고 받는 IR-3 비자와 달리 자동으로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파양당한 존을 재입양한 양부모는 주 정부의 법에 따라 입양 절차를 완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존은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았다. 그 결과 주 정부는 범죄에 연루되었으며 시민권이 없는 입양아에게 출생국으로 돌아가라고 추방 명령을 내린 것이다. 결국 존은 출생국(한국)으로 이십구 년 만에 돌아와 유령처럼 떠돌다가 자신의 유골을 뉴욕 양부모에게 보내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소설집에는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의식이 날카롭게 빛나는 작품들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소설집의 첫번째에 수록된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는 요리(음식)를 매개로 해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조명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어머니는 늙어서까지 남자를 위해 “한 달이면 대여섯 차례나 크고 무거운 택배 꾸러미”에 담긴 음식을 보내고는 했다. 거기에는 “김치와 된장, 고추장, 나물과 젓갈”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남자가 고향집에라도 오면, 시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정성은 더욱 뜨거워지고는 했다. 그러나 기억을 잃어버린 시모가 더 이상 음식을 보내지 못하게 되자, 남자는 “당황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남자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핵심에는 자신에게 음식을 끝없이 만들어주는 어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늙은 “형수가 만든 형편없는 음식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던 날”, 남자는 “억지로 젖을 떼이는 아이처럼” 공포와 짜증에 휩싸여버린다.
「유채」와 「좋은 어머니들」은 여성성의 핵심 중 하나인 모성을 파고든 작품들이다. 세월호 참사를 배경으로 한 「유채」의 초점화자인 소하는 유채가 만발한 섬으로 수학 여행을 떠난 고등학생 아들 율의 죽음에 고통받는다. 이 작품에는 소하가 우울의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하의 우울증적 상태는 “일 년 육 개월 전 율이 집을 나간 그날에 멈춰 있”는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소하는 율과 친구들이 죽어가던 그 현장을 추체험하는데, 이 대목은 서성란의 문학적 기량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잘 보여준다.
「좋은 어머니들」의 어머니는 제목과는 달리, 기존의 모성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존재이다. 재욱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혼자서 세 아들을 힘들게 키워낸 어머니이다. 이런 어머니라면 전통적인 모성 신화의 주인공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아버지가 모두 분명치 않은 세 명의 아들을 철저하게 차별한다.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세 아들에게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사진을 보여줄 뿐이다. 막내 아들은 예뻐하며 가까이 두고 의지하지만, 큰아들인 재욱은 정서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멀리하며 거리를 둔다. 더욱 끔찍한 것은 둘째 아들 성욱에 대하여 한없이 냉정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욱은 후천적 장애를 안고 자기만의 골방에서 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좋은 어머니들」은 무조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우리 사회의 모성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유채」에서 소하가 보여주는 모성이 지닌 사회적 성격을 더욱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는 ‘불안하지만 불가피한’, 혹은 ‘불가피하지만 불안한’ 진실과의 대면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혜순은 시 쓰는 교수 남편과 희곡을 쓰는 예비 교수 딸을 둔 중년 여성으로서, 우아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한 권의 수필집을 출판한 어엿한 작가로서, 볕이 좋은 날이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녀의 일과이다. 그런데 이 행복을 위해 혜순이 평생 동안 꾹꾹 숨겨온 진실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 순간은 딸 연희가 쓰고 있는 희곡 「돌아오는 아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희곡은 입양아들에 대한 것으로서 대극장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평소 혜순은 가장 먼저 딸의 글을 읽고 평가를 해주었지만, 이번만은 딸의 글을 읽으려고도 당연히 칭찬이나 격려를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혜순은 지금 책을 읽을 수도, 단 하나의 문장도 쓸 수가 없는 상태이다. 혜순이 이토록 큰 충격에 빠진 이유는, 딸이 쓰는 희곡 「돌아오는 아이들」이 혜순이라는 주체의 중핵에 해당하는 진실을 건드리고 있는 것과 관련된다.
「봉희」는 ‘진실에 바탕한 글쓰기’가 아예 자서전 쓰기로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봉희」에서 봉희는 결혼 29주년을 맞이하여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자 한다. 이러한 결별에는 여성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아로새겨져 있다. 결별 선언은 봉희가 자서전 작가로 탄생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것은 글을 쓴다는 것이 서성란의 소설에서는 여성의 새로운 주체 확립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삼십여 년간 서성란은 한국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문학적 형상화를 해왔다. 이러한 형상화가 더욱 빛나는 것은 ‘약자들에 대한 형상화’가 지닌 기본적인 아이러니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을 동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의식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여전히 섬세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화에 있어 또 하나 전제되어야 할 태도는, ‘재현 주체’와 ‘재현 대상’의 거리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섬세한 성찰과 공감을 지니고 있더라도, ‘재현 주체’는 결코 ‘재현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해 서성란은 글쓰기에 대한 발본적인 탐색을 지속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오직 진실에 입각한 글쓰기만이 참된 문학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진정성이야말로 ‘재현 주체’와 ‘재현 대상’의 거리에서 발생하는 재현의 근본적인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하나의 출구인 것이다. 여기까지 서성란의 작품을 읽어왔다면, 그녀가 끊임없이 한국 사회의 약자들을 찾아내어 형상화하는 작업은 결코 소재주의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보여줄 새로운 고통과 소외에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