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유서 깊은 대구에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그분들의 이름을 붙인 나무가 많다. 중구 달성공원의 서침나무, 대구제일교회의 현제명나무, 중구 종로초등학교의 최제우나무, 동구 옻골의 최동집나무, 중구 천주교대구대교구청의 타케나무 등이 좋은 예다. 그뿐만 아니라 무열대에는 무열수라는 수백 년 된 모과나무 노거수도 있다.
이런 빼어난 노거수 이야기는 몇몇 사람들에게 회자될 뿐 아쉽게도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이에 대구에 역사성을 간직한 나무를 중심으로 그 나무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살펴보고 우리 고장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자 책을 펴낸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상북도에 있는 같은 종의 노거수나 유명한 나무 이야기도 적었다.
[책 속으로]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문일평은 『화하만필(花下漫筆)』에 “고려 때 시인 정지상은 매화 그림을 잘 그렸고, 어몽룡의 매화 그림은 조선에서 으뜸으로 일컬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어몽룡의 묵매(墨梅) 가운데 늙은 매화나무 둥치에서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가지에 성글게 핀 매화와 어스름한 달이 조화를 이루는 월매도(月梅圖)는 5만 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초상화 뒷면에 들어있어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p. 23, 봄 '매화나무' 중에서
국내 왕벚나무의 자생지를 최초로 찾아낸 사람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프랑스인 선교사 에밀 타케(Émile Joseph Taquet, 1873~1952) 신부다. 1902년부터 1915년까지 제주도에서 사목하던 그가 1908년 4월 15일 제주도 한라산 북쪽 관음사 뒤 해발 600m 지점의 숲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해 1912년 독일 베를린대학교의 쾨네 박사에게 감정을 받음으로써 왕벚나무 자생지가 한국임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다. 대구 중구 남산동 천주교대구대교구청 뜰에는 타케 신부가 1930년대 유스티노 신학교에 재직할 때 심은 왕벚나무인 일명 타케나무가 있는데 해마다 봄이면 소담스러운 꽃이 활짝 핀다.
-p. 49, 봄 '벚나무' 중에서
아까시나무의 학명은 로비니아 슈도아카시아(Robinia pseudoacacia)다. 프랑스 원예가 로빈이 신대륙에서 아카시아와 비슷한 나무를 유럽으로 가져왔는데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가 그의 이름을 따서 속명을 로비니아로 했다. 종소명은 아카시아를 닮았다는 뜻의 슈도아카시아라고 붙였다. 학명으로 풀어볼 때 '로빈이 가져온 가짜 아카시아나무'이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학명에서 '가짜, 모조'라는 의미인 슈도(pseudo)를 빼버리고 그냥 아카시아(acacia)로 부르게 된 모양새다.
진짜 아카시아나무는 열대성 상록수로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기린이 잎을 먹는 키가 큰 나무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아카시아라는 다른 나무가 엄연히 있는데도 표준어가 바뀌기 전까지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불렀다. 지금부터라도 아까시나무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면 나무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고 사람들도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p. 86, 봄 '아까시나무' 중에서
대구 중구 달성공원에는 수령 200년 넘는 회화나무가 있다. 조선 세종 때 달성토성의 땅을 정부에 헌납한 달성 서씨의 구계 서침 선생을 기리기 위해 대구시에서 회화나무의 이름을 서침나무로 명명했다. 서침 선생은 달성토성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에 조정에서는 보상을 제의했지만 사양하는 대신 대구 지역 백성들의 환곡을 깎아달라고 건의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p. 139, 여름 '회화나무' 중에서
김천 직지사의 일주문 같은 큰 절에 있는 아름드리 기둥이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항간의 소문이 있었지만 조사한 결과 느티나무로 밝혀졌다. 이는 사리함을 만든 느티나무를 용도에 방점을 두고 사리나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용도가 아닌 목재 이름으로 오해하게 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싸리나무로 와전된 게 아닌가 싶다. 또 큰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수백 명이 먹을 밥을 담는 구시 역시 느티나무로 만들었다.
흔히 우리나라를 소나무 문화라고 표현하지만 소나무를 널리 이용한 시기는 조선시대다. 고려시대에는 느티나무를 많이 활용했으므로 느티나무 문화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한편으로는 수긍한다.
-p. 156, 여름 '느티나무' 중에서
봉황이 앉아 쉬는 오동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오동나무가 아니라 벽오동(碧梧桐)을 일컫는다. 여기에 연유돼 향교나 서원, 별서 정원 등 선비들의 공간에 벽오동을 심고 가꿨다. 보통 오동나무는 속이 하얗기에 백동(白桐)이라 부르고 벽오동은 껍질이 푸르기 때문에 청오(靑梧) 혹은 청동목(靑桐木)이라고 부른다. (중략) 우리는 봉황을 화투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화투의 11월을 상징하는 속칭 똥광 그림의 닭과 비슷한 새가 실은 봉황 머리다. 함께 그려진 오동 잎을 짧게 발음하다 보니 똥으로 부르게 됐는데 실제로는 벽오동 잎이다.
-p. 206, 가을 '벽오동' 중에서
은행나무는 2억 7천만 년 전, 늦추어 잡아도 공룡시대인 쥐라기(1억 3천500만~1억 8천만 년 전) 이전부터 지구에 터를 잡아왔다. 진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금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찰스 다윈은 '살아있는 화석(living fossil)'이라고 했다. 이 말은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자기만 살아남고 친척이 모두 사라져 버린 종을 가리킨다. 그만큼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왔다는 뜻으로 읽힌다.
은행나무는 식물분류학으로 보면 1목, 1과, 1속, 1종이다. 넓은 잎을 가졌음에도 침엽수로 분류된다. 나무 종류를 보다 정확하게 분류한다면 '은행수, 침엽수, 활엽수'로 분류해야 하지만 하나의 종(種)밖에 없는 은행나무 때문에 따로 떼서 취급하기가 너무 불편하니 편의상 침엽수에 포함시킨다는 게 학자의 설명이다.
-p. 217, 가을 '은행나무' 중에서
달서구 죽전동(竹田洞)은 대구광역시 달서구의 24개 법정동 중 하나로 농림촌, 상리(上里), 송골, 옷박골(옥박골, 옻밭골), 큰마실(큰마)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주민들이 부업으로 대나무 갈퀴를 많이 만들어 팔았는데 갈퀴를 만들 대나무가 많아서 대밭의 한자 '죽전(竹田)'으로 불렸다.
달성군 죽곡리(竹谷里)는 자연마을 죽곡(竹谷), 대실에서 나온 명칭이다. 신라시대에 가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산에 성을 쌓고, 화살로 사용하고자 성 아래 대나무를 심어, 마을 전체가 대나무로 덮여 있다고 하여 대실 또는 죽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p. 241, 겨울 '대나무' 중에서
측백나뭇과 식물이 한반도에 함께한 시점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2009년 경북 포항시 동해면 금광리의 한 도로 공사 현장에서 무려 2천만 년 전 측백나뭇과 나무 화석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측백나뭇과에는 측백나무, 편백, 삼나무, 향나무 등이 포함된다. 보존 상태가 좋고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 국가유산청이 천연기념물 '포항 금광리 신생대 나무화석'으로 등록했다.
-p. 270, 겨울 '측백나무' 중에서
대구수목원이 생기기 전에는 대구에서 호랑가시나무를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수목원 덕분에 호랑가시나무를 가까이서 완상할 수 있다. 2020년 대구수목원에서 발간한 『앞산의 나무도감』에 용두골에서 호랑가시나무가 자란다는 내용이 있다. 마음속으로 호랑가시나무가 자생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에 부풀어 현장에 가보니 민가가 있는 지역에 정원수로 심어진 것이 제대로 관리가 안 돼서 부쩍 크게 자라있었다. 기후 온난화로 대구와 같은 분지의 산골짜기에 난대 수종이 자라는 게 이젠 큰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세상이다.
-p. 294, 겨울 '호랑가시나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