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포엣 시리즈 43권 한지산 시인의 『유령, 도둑, 사랑』
“슬프고 가끔 엉뚱하고 간혹 사랑스럽고 아주 드물게 다시 꾸고 싶은 이야기”
2021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한지산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다. 2024년 심훈문학상 당선작 52편을 한 권으로 묶었다. 심훈문학상 심사 당시 “일상의 사물과 어그러진 풍경 속에서 존재의 이면을 탐색하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시적 공간을 창출해낸다”(심사위원 김근·안현미 시인, 허희 평론가)는 평과 함께 심사위원들의 고른 지지를 얻었다.
이 커다란 도시에서
우리는 유령처럼 모두 혼자이지만
“우린 꿈속에서도 같은 시대를 살아보자고 깍지를 꼈다.”(「가름끈에 대하여」)
『유령, 도둑, 사랑』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익숙한 도시 공간에 발을 붙이고 서서 쓰인 듯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한 발짝 떨어져 그 모두를 지켜보고 있기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 속 인물들은 도시 공간을 자유롭게 부유하지만 그 모든 것에 직접적인 영향력은 행사할 수 없는 유령처럼, 희미하고 외롭게 존재한다. 평범한 생활을, 때로는 절실한 생존을 주체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하고 또 가능하지 않은지를 골똘히 탐구해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시대의 일원으로” 살고자 하지만 “그런 나는 지금 방해만 될 뿐”이라고 느끼기도 한다.(「입주청소」) 오로지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 아닌데도 자주 외로운 순간을 발견하게 된다. “깍지를 꼈는데도 혼자”(「유령과 함께 춤을」)이고 가만히 앉아 내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를 기다리기만 하기도 한다.(「죽음 일지」) 그럼에도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누구도 나의 것이 아니”(「유리창 너머」)라고 느끼는 만큼 고독이나 외로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자신과 부딪친 사람을 향해 “저기요,/한순간이나마 우린 겹쳐졌어요”(「고시원」)라고 건네는 말은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에서 무언가가 시작될 수 있을 것도 같다.
가정과, 사회와, 세계와 불화하며 존재하는 현대인들이 나 자신과 불화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것은 세계의 규칙이 개인에게 옮아온 것이기도 하다. “네가 대학생 때 처음으로 대출을 받은 돈에 대한/이자를 갚는 건 내리는 눈을 끝없이 치우는 것 같기도” 하다고 쓰거나 “생활이 장기연체 중”(「유리창 너머」)이라고 쓸 때, 무언가가 유예되어 있다고 느끼고 “진짜 내가 아니라 나의 껍질”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서 “껍질한테서 나에게로 점점 가까워지는 질문을”(「Below Zero」) 떠올려볼 때,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나’와 ‘너’, ‘우리’가 갖는 곤란과 곤경들은 오직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평면에서 입체로 나아가려면 나만큼의
내가 필요하다”
도저히 깨부술 수 없을 것 같은 견고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세계를 한지산 시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묘해보면서, 자신만의 입체를 만들어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영원한 사랑” 같은 게 가능할지는 알 수 없고, 지금은 이루어진 것들이 끝에 가서는 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도 짐작할 수 없지만 원하는 결말이 펼쳐질 가능성을 탐색해보면서 시인은 자신이 “아는 만큼만 말하기로”(「 ( )에게」) 한 것 같다. 한지산 시인이 기록하는 “슬프고 가끔/엉뚱하고 간혹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은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생활과 관계를 탐색해보게 한다.
『유령, 도둑, 사랑』의 수록작 중 20편은 서린(Lynn Suh) 번역가의 영역을 통해 영문판 『A Ghost, a Thief, and Love』로도 출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