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에 묻어 둔 이야기들이 많다. 여태 다른 사람들에게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사연들이 여전히 심연(深淵)에 웅크리고 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그런 얘기들을 끄집어내 세상에 훨훨 날려 보내고 싶었다. 오랜 세월 나를 옭아매고 있던 원죄(原罪)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끄집어내려 하니 용기가 나질 않는다.
부끄럽지만 내 이야기를 아주 조금 꺼냈다. 꺼내면 꺼낼수록 드러나는 나의 본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약간 포장도 했다.
요즘 내 인생의 화두는 ‘곱게 늙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추해지는 군상(群像)을 마주할 때마다 더 드는 생각이다.
이 책에, 젊은 시절 쓴 글 일부와 사는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들, 고맙고 미안한 마음, 몇몇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세상이 좋아지는 일과 관련된 글들을 실었다.
- 3쪽(〈작가의 말〉 부분)
떠나간 여자에게 미련을 두고 살지 않았다. 늘 새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자. 절대 미련 두지 말자. 떠나간 사람을 다시 붙들 수는 없는 일.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후회했다. 지난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말했던 여자, 곁에 있어 주기를 늘 원했던 여자, 소금인형이 되기를 원했던 여자. 그런 여자를 나는 버렸다. 단지 내 싸움에 방해가 된다는 별것도 아닌 이유 하나로. 나는 그녀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헤어지던 날, 그녀가 내게 한 말은 “독한 놈”이었다. 그래 나는 독한 놈이었다. 독해도 지독하게 독한 놈이었다. 가지 말라고 붙들지 않았다. 오히려 “잘 가”라고 말했다.
- 29쪽
외로움도 늙는다는 것은 그 감정이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변해간다는 뜻이다. 외로움은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고 나면 마침내 한 겹의 따뜻한 담요처럼 우리를 감싸며 편안함을 준다. 외로움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며 우리 삶의 일부로 남아 나이 들면서도 여전히 함께한다. 외로움을 벗 삼아 살다 보면 어느새 외로움은 불편한 감정이 아닌 익숙한 친구가 된다.
- 53쪽
“행복하자”는 말은 마음속에 스며드는 약속과도 같다. 힘들고 지친 날에도, 우리가 다정히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짐하는 한마디. “행복하자.” 그 다짐에는 화려한 무엇도 필요 없다. 작은 꽃잎 하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순간,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손을 녹이며 느끼는 위로, 오랜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행복이다.
- 61쪽
“그 말은 좀 외로웠다.” 사람들 사이를 떠돌다 어느새 내 귓가에 닿은 그 말은 길을 잃고 한참을 떠돈 것 같았다. 처음엔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려 했지만, 묘하게도 마음속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그 말은 가벼운 듯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무게를 지닌 채 내 안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어쩌면 그 말 속엔 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깊이 숨겨둔 그리움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든 닿고 싶었지만, 끝내 그 누구의 가슴에도 완전히 닿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린 말. 무심한 말처럼 던져진 것 같지만, 어쩌면 그 속에는 진심이 머물러 있었다. 누군가의 온기를 바라고 마음과 마음이 맞닿기를 소망했을 그 말이기에 그저 흘려보내기엔 마음 한편이 아렸다.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