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다윗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다윗 주변에 일어난 사건들이 사실이라면, 구름 위에서가 아니고, 인간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잖는가? 그 역사의 땅을 다윗과 함께 밟고 싶었다.
다윗을 소개한 유일한 고대문서인 히브리전승(구약)을 경전으로만 볼 것인가, 역사 속 경전으로 볼 것인가? 번민에 늘 빠지고는 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개방된 생각을 가졌던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궁켈(Hermann Gunkel), 폰 라드(Gerhard von Rad), 노트(Martin Noth), 존 브라이트(John Bright),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등 히브리전승 연구가와 현대신학자들에게 빚을 졌다.
“이 글은 창작이다. 히브리전승을 기초로 썼다. 세 푼(分)은 전승의 내용과 일치하며, 칠 푼은 허구다. 하등비평(성서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는 본문비평 방법)과 고등비평(성서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역사적으로 재해석하는 양식비평 방법)을 병행하여 집필했다.”
나보다 더 슬픈 영혼에게 이 글을 바친다.
- 5쪽(〈글을 시작하며〉 전문)
즉위식은 왕관도 없는 초라한 행사로 치러진다. 사울이 앉은 보좌는 통나무로 만든 의자다. 그러나 다른 근동 민족처럼 왕을 위한 제사를 드린다. 산당 앞 바위를 네모나게 깎은 번제단 위에 소, 염소, 양을 잡아 피를 뿌리고 또 희생물로 태운다.
제의를 끝낸 후, 사무엘이 야훼의 이름으로 사울이 왕이 된 것을 선포한다. 그러나 사울과 백성들을 향해 축사 대신 경고를 한다.
“야훼께서는 너희들이 원해서 왕을 보내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이교도 왕들과는 다르게 야훼에게 순종해야 한다. 백성들도 왕의 명령보다 야훼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대들은 오늘 내가 한 명령에 순종하겠느뇨, 맹세하겠느뇨?”
- 36쪽
황혼이 짙을 녘, 다윗이 석양을 등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사무엘 앞으로 불려 왔다. 머리칼이 검붉고 얼굴이 희며 볼이 연홍빛 소년이다. 양가죽 옷을 입고 있는데 막대기와 지팡이를 들고 있다. 사무엘이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본다.
‘사울처럼 장대하지 않지만, 눈빛이 총총하구나. 신앙으로 잘 닦고 다듬어서 길들이면 군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무엘의 굳었던 얼굴이 스르르 풀어지며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양떼를 잘 돌본다고?”
“야훼가 길러 놓은 풀밭과, 야훼가 물을 풀어 흐르게 한 여울목으로 야훼의 양떼를 인도했을 뿐입니다.”
다윗의 언변에 사무엘의 입이 벌어진다.
“이 자가 바로 야훼께서 택한 자다. 내가 이 소년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다!”
다윗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릴 때, 사무엘이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무릎을 꿇고 야훼의 뜻을 받들라!”
- 139쪽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 신만이 참 신인 줄 알게 하겠다.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온 무리로 알게 하겠다!”
다윗은 달려가다가 물매로 한 번 더 큰 원을 그리더니 힘차게 던졌다.
“슁!”
“악!”
물맷돌은 힘차게 날아가 다가오는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켰다. 투구가 벗겨져 떨어지며 그가 그대로 땅바닥에 벌렁 넘어진다. 다윗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간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수행병사가 방패를 내버리고 뒤돌아 도망친다.
쓰러져 발발대는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그의 장칼을 빼앗아 가슴팍에 힘껏 박는다.
- 162쪽
기원전 1050~1040년경, 사울은 열두 지파가 지지하고 또 반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오른다. 왕을 세우게 된 동기가 어떠할지라도 이스라엘이 신정정치(神政政治)를 끝내고 왕정정치(王政政治)로 전환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이미 이스라엘은 유목민족으로서 유랑은 끝나고 반유목민으로 정착했으며, 씨족 및 부족의 권위는 붕괴되었다.
왕권이 요구된 가장 결정적이었던 자극은 절망적인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나왔다. 사무엘 시대에 히브리민족은 블레셋족과 대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고도의 전투력을 가졌던 그들에게 순종할 것인가 도망할 것인가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또 암몬족의 공격과 아말렉족속과 같은 호전적인 유목민족과의 대결 속에서 계속 신음하고 있었다. 느슨한 부족 중심의 열두 지파 동맹으로 그 난관을 헤쳐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4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