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운의 소설은 남루한 삶일지라도 존중받아야 할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물질적 궁핍과 그에 따른 정신적 모멸은 그 당사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가난이란 그야말로 죽고 사는 것이 걸린 문제이다. 이와 같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는 누군가에게는 형이상학적인 실존의 문제를 도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바로 그 생존의 구체성이라는 바탕 위에서 구원의 형이상학을 깊숙이 파고든다. 그러나 또 어떤 작가는 오직 생존을 둘러싼 세속의 이전투구를, 그것 자체로 핍진하게 보여주려는 재현의 성실성을 통해서 자기의 할 일을 해내기도 한다.
「지구라는 집을 놓고 생각해보면」이라는 소설은, 거처할 곳이 없어 비참을 겪어야 했던 그 극빈함의 피폭(被爆)이 남긴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 소설은 결혼 삼 년 차의 남자가 이사를 앞두고 이런저런 실무적인 고민으로 잠을 설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사가 시작되었지만 일의 진행이 순조롭지 않게 되면서 남자는 점점 지쳐가는데, 그 수선스러운 틈에 집에 관한 그의 진솔한 고백이 회상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무엇보다 그는 정착하거나 안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아야 했던 사람이었다. “잠시 거쳐 간 곳은 빼고, 한두 해라도 살았던 곳만 꼽아도 양 손가락은 진작이고 발가락까지 접을 지경이었다.” ‘답보 상태’의 인생에서 벗어나 결혼을 했고, 비정년 트랙이긴 하지만 이제 막 대학의 전임 자리를 얻은 아내의 배 속에는 곧 태어날 아이가 자라고 있었지만, 그렇게 나름의 안정된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불안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아야 했던 주거의 불안정이 그 불안의 주된 이유인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이 마법의 성이나 슈퍼맨과 같은 영웅을 꿈꾸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내기에는 현실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어린아이들은 초월의 환상 속에서 구원을 소망한다. 정재운의 소설에서 ‘어른’에 대한 절실한 갈망은 바로 그 소망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레이니데이」의 엄마(구금비)와 딸(신은비)에게도 기댈 곳이 없다. 그들에게는 바이오맨이나 후뢰시맨과 같은 든든한 남편이나 아버지가 없다. 그들의 남자 카심은 몇 해 전에 공장에서 일하던 중에 죽었다. 이주 노동자이자 불법 체류자였던 그는 산재 판정도 받지 못했다. 대신 마흔이 다 되어가는 금비는 여덟 살 은비를 위해서 ‘화이트맨’처럼 하얀 작업복을 입고 김치공장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며 일한다. 금비에게 슈퍼맨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오직 돈이다.
아버지의 상실과 부재 속에서 자란 아이, 어른의 손길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는 평범한 어른으로 성장하기가 어렵다. 자기의 자식을 유아화함으로써 그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부모를 일컬어 ‘독성의 부모’라고 하는데, 이들은 본인의 정신적 상처와 결핍을 자식에게 투사함으로써 그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삶을 파탄낸다. 중편 「악어」의 주인공인 남자는 유복자로 태어나 그런 독성의 엄마에게서 양육되었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이 엄마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집요할 뿐 아니라 성애적이기까지 하다. 자력으로 살아낼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자라난 남자는 끝까지 돌봄과 보살핌의 갈망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남자의 이런 비루한 의존성은, 역시 ‘어른’이 되지 못한 그 성장의 불구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을 홀로 서지 못하게 한다는 것, 빈곤으로부터의 피폭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물이 물속으로」는 좌절(트라우마)과 그 극복(치유)의 문제를 다룬다. 헤어진 지 삼 년이 지난 예술가 커플이 다시 만나서 보낸 하루의 시간 속에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이 틈입되어 있다. 괜스레 난해한 말을 늘어놓는다거나, 경계를 가로지르는 불연속의 감각으로 꿈과 현실을 뒤섞는 등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과는 형식적으로 결을 조금 달리하는 작품이다. 소설에서는 중국의 대도시와 부산의 중앙동을 병치하는 가운데, 자본주의라는 체계의 총화인 대도시에서 드러나는 어떤 부조리한 풍경들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한다.
「경이로운 동그라미」는 어떤 기백과 강력한 의지를 공표하는 선언문처럼 읽힌다. 현철은 대학 졸업 전에 단순한 봉사활동이라고 생각하고 가난한 동네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동그라미’라는 공부방의 교사로 참여했다. 그 안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름의 보람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남들과 비교하며 자기의 앞날을 내다보면 희망을 갖기 어려웠다. ‘동그라미’는 이 가난하고 찌그러진 현실을 벗어난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을 표현한다. 친구 준엽은 ‘현실의 경이로움’이라는 그 이상을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믿음에 지친 현철에게는 준엽과 같은 사람은 그저 ‘미친놈’이고 ‘돈 안 되는 인간’일 뿐이다. “미친놈이 아닌 바에야 그렇게 할 이유도 없는데, 참 고집스러운 놈이었다. 이런 자들더러 사회는 돈 안 되는 인간이라고 하질 않나.” 이 소설은 그렇게 ‘동그라미’(완전한 이상)라는 믿음의 바깥으로 뛰쳐나갔던 현철이, 그곳에서 가르쳤던 아이들의 처참하게 타락한 모습(찌그러진 현실)을 고통스럽게 마주한 뒤에, 마침내 존재론적 갱신을 겪어내고 다시 그 불가능한 이상을 향해 투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정재운의 소설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담아낸 빈곤의 현실은, 그것이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 얼마나 큰 위협일 수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환기시킨다. 빈곤의 수난으로 자기의 존엄을 훼손당한 사람은, 삶의 의욕과 희망을 놓쳐버리거나 놓아버릴 수 있다. 내재적인 해결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초월적인 것에 매달리게 되고,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무너져버린 자존감은 고립과 동시에 외부에 대한 의존을 강화시킨다. 경쟁의 체계에서 의존은 일종의 무임승차로 여겨지며, 따라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자들은 혐오와 멸시의 대상으로 내몰린다. 그런 비정하고 가혹한 빈곤의 체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물이 물속으로」와 「경이로운 동그라미」에서는 생존을 위한 나름의 방안을 궁리하고 제기하기도 했다. 다른 소설들에서도 어른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책임’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렇게 책임이 빈곤의 문제와 만나게 될 때 가장 흔하게 자행되는 것이, 가난의 당사자에게 그 책임을 묻거나 돌리는 방식이다. 이른바 자립과 자활의 담론들이 그 당사자들에게 탈빈곤의 책임을 압박한다. 물론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하지만, 어른들의 돌봄에서 소외됨으로써 취약해져버린 결핍의 상처를 간단하게 질타할 수는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립은 관계 속의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것의 협력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상호 의존의 당연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