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4월의 어느 날 밤,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바람과 코를 자극하는 숲 냄새, 알 수 없는 산새들 소리. 나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P. 16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돈 다 갚으면 이 새끼 멱부터 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주먹에 힘을 주며 냉장고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그 새끼의 잔심부름을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갔고, 산속의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이 인간들의 흥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P. 18
그 물체가 땅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건…… 사람이었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둘이었다. 그 둘 중 한 사람은 어린아이 같았다. 미친 듯이 달리던 자동차가 사람을 친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P. 32
“불교에서는 저승으로 건너가는 강을 삼도천이라고 합니다. 그 물을 마시면 이승의 기억을 지운다고 알려져 있죠. 따뜻하게 한 모금 드세요. 삼도천처럼 나쁜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머릿속을 정화하는 데는 조금 도움이 될 겁니다.”
P. 36
6월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파란 하늘 아래 도로 위를 빨간색 페라리 한 대가 빠르게 달리고 있다. 단조롭지만 평온한 회색의 일상을 붉은색 줄이 관통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런 안하무인인 행동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규정 속도로 달리는 다른 차들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듯 빨간 페라리는 이리저리 추월해 아슬아슬하게 달리면서 여기저기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P. 45
“개망나니 새끼. 계속 사고 치면 어디 외국이라도 보내 놔야겠어. 그 일 뒤로 좀 죽어 지내는가 싶었더만 두 달이 안 돼서 또 저 모양이니. 전보다 발작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정신 전문의까지 붙여 줬는데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저 새끼 저거 내 자식만 아니었으면 벌써 갖다 버렸을 거야.”
P. 46
여성의 이름은 오정혜, 심리 전문가이자 정신건강의학과 박사다. 정기적으로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 동안 직원들을 위한 헬스 케어 상담을 하는데, 조 회장의 의뢰로 석기의 정신 상담 주치의를 맡고 있었다. 그녀는 큰 눈에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이국적인 미인이었다.
P. 56
전화기 너머에서 정석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석기는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석기의 차 전조등 불빛이 닿은 저쪽 길바닥에 뭔가 물체가 있었다. 석기는 얼빠진 얼굴로 차에서 내려 그 물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물체의 윤곽이 뚜렷해지자 석기는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P. 89
“인간의 기억이란 게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에 빠지고 그렇게 희미해진 조각들은 상상으로 채우는데, 그 내용은 보통 자신이 느끼는 것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형 씨 치료도 그런 식으로 조금씩 교정하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