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가가 된 철학자, 백휴 선생의 ‘추리소설 읽는 철학 수업’
평생 추리소설로 철학하며 집필해온 글의 정수만을 담은 책
추리소설은 서구의 정신이 몰락하는 와중에 생겨난 문학 장르다. 추리소설가는 은유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며 새로운 은유 사용법을 요구한다. 시詩가 사유와의 대립을 통해 그랬던 것처럼 추리소설 또한 사유의 자극제일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인이지만 근대 추리소설의 시조로 불린다. 심리학자 크루치J. W. Krutch는 포가 미치지 않기 위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이 말은 과장된 말이다. 포는 ‘시 쓰기’를 지적인 작업으로 변형시킨 사람이다. 시적 상상력과 천문학적 지식을 버무려 《유레카》를 쓴 포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는 발산했다가 수렴(수축)한다. 이 수렴을 대변하는 문학 장르가 시인 동시에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은 주변부 문학’, 순문학이 아닌 ‘잡문학’, ‘오락에 불과한 읽을거리’라는 우리 사회의 폄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철학은 부분적으로 추리소설적이어야 한다’고 말했고 움베르토 에코는 가장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성을 갖는 추리소설의 플롯을 외면함으로써 이탈리아 문학이 망가졌다고 말하며 《장미의 이름》를 썼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유나 추리소설은 공히 ‘위반’의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해 《비잔틴 살인사건》이라는 철학적 추리소설을 썼다. 사상가들이 추리소설로 자신의 철학을 형상화한 이유는 무엇인가? 위대한 철학자들이 추리소설 텍스트를 분석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추리소설은 살인 사건을 다룬다. 살인이란 인간의 극단적인 행위에 속한다. 철학이나 사유 또한 극단적 사색으로 점철돼 있다. 평생 추리소설로 철학을 해온 한국 추리작가 백휴에게 진정한 사유란 공동체를 유지하고 그 속에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를 넘어서 세상의 모든 권위와 권력을 뿌리부터 의심하는 작업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 애거서 크리스티, 히가시노 게이고, 서미애, 정유정…
추리소설로 철학하는 지적인 쾌감과
극단까지 밀어부친 사유의 풍경을 만난다
《추리소설로 철학하기》는 에드거 앨런 포에 의해 시작된 추리소설이 현시점에 이르기까지 어떤 방식으로 대중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작가의 사유를 텍스트에 숨겨왔는지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이따금 천재 탐정의 예리한 눈빛을 볼 때 허허벌판에 선 인간의 당혹감을 즐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라고 반문하는 백휴 작가의 평생에 걸친 치열한 사유를 만끽하며, 추리소설로 철학하는 지적인 쾌감과 백휴의 극단까지 밀어부친 사유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움베르토 에코는 21세기는 추리소설의 시대가 될 거라고 예감했다. ‘탐정은 기호학자다! 움베르토 에코’, ‘사유하는 추리소설가 줄리아 크리스테바’ 편에서는 현대 문학의 위기를 절감하며 자신들의 사상을 추리소설로 표현한 작가들의 텍스트를 분석했다. 저자는 에코의 추리소설 속 사건 현장을 넘쳐나는 자연기호들을 해독해야 하는 전형적인 기호학의 무대로 보았다. 또한 철학과 추리소설이 공통적으로 ‘위반’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을 꼬집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잔틴 살인사건》을 통해 철학하는 경험을 누리게 한다.
에드거 앨런 포의 탐정인 뒤팽의 자기의식 문제, 애거사 크리스티의 코지 미스터리가 담고 있는 대영제국 몰락에 따른 상실감을 보상하기 위한 전원생활과 향수와 극장이론, 레이몬드 챈들러의 미국식 실존주의, 폴 오스터의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인 《뉴욕 삼부작》,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관통하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 사상 등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추리소설가들과 작품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백휴는 작가들의 전작을 통해 발견되는 공통된 패턴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중심으로 철학적 사유를 펼친다. 특히 주변부 문학으로 관심 밖에 밀려나 상대적으로 폄하되어온 한국의 추리소설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김내성의 ‘탐이探異’, 김성종의 실존적 슬픔과 세대 단절을 상징하는 ‘아기’, 김내성이 한계를 보인 지점에서 가치를 드러내는 류성희의 ‘철학적 타자’, 서미애의 ‘경계선’, 정석화의 ‘알레고리’, 황세연의 ‘아이러니’, 정유정의 ‘호모 사케르’ 등등. 작품의 플롯을 지배하는 이 모든 핵심 키워드를 살펴보면서, 추리문학에 대한 통념이나 이 분야 종사자의 인식이 어떻든 백휴는 자신이 찾은 사유의 길을 따라 파고든다.
서양 철학이 ‘신은 죽었다’는 니체 선언 이전과 이후로 나뉘고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며 새로운 철학들이 태어나는 풍경 속에서 탄생한 추리소설. 그 기원을 탐색하면서 ‘추리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은 추리소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반전을 통해 독자가 갇혀있던 사유의 틀을 깬다. 백휴의 사유는 마지막으로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의 원초적 질문까지 이른다. 최인훈과 탐정 브라운 신부를 만든 체스터튼을 통해 서구의 시각적 사유와 한국 사회의 유교와 한글이 빚어낸 청각적 사유를 소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자 하는 지점까지 도달한다.
한 번 시작된 철학적 사유는 휴식을 모르기 때문에 ‘철학은 위험하다’는 니체의 말대로 일단 시작된 철학적인 질문들은 답이 찾아질 때까지 강박에 내몰리면서 끝없이 질문에 매달려온 인생, 평생 철학적 삶을 살아온 백휴 선생의 사유 인생이 담긴 책을 내놓는다.
“사유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을 다루기에 흥미롭다. 철학에는 허용되지 않는 그 어떤 질문도 없다. 물음에 성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설픈 타협이나 거짓 화해도 용납되지 않는다. ‘사유와 추리소설은 공히 위반의 문제’라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생각이 옳아 보인다. ‘위반’이란 결국 ‘극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추리소설과 사유에서 ‘극단極端’을 보았기에 나는 평생 철학하는 추리소설가가 되었는지 모른다.”_백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