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인공처럼 군다.
그래서 이 삶이, 이 실패가 너무도 분하다.
―「제정신세계」 중에서
나는 실신을 경유하여 절벽에서 칠천 번의 추락을 감행하였으며, 그때 아버지의 얼굴에 이천오백 번째 침을 뱉고 있었거든요. 처음 보는 할머니가 느닷없이 나타나 나의 엉덩이에 매질하기 시작하기도 하였는데요, 벼락 맞은 박달나무로. 부지불식간에 나의 사지에 줄을 묶어 사방으로 당기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윽고 끊어지면서 알았어요. 독립... 더보기
입술을 오므린 내가 거울 속에 많아지자, 우리는 서로에게 실패를 말하기 위해 밀려온 느낌입니다.
―「게슈탈트」 중에서
내가 너를 길렀다. 나는 주인이었으며, 너는 양육되는 개였으므로. 어미로부터 버림받은 너를 포육하며, 가령 짐승의 젖을 몰래 짜 먹이거나 짐승의 내장을 발라 먹이며 사랑과 다짐을 배웠으므로. 그리하여 나 또한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너는 알까.
―「비세계」 중에서
육교를 건넜다. 대교를 건넜다. 나만 걷고 있었다. 잠시 백기를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백기는 때가 타 있었으며, 나는 가까운 천에 가 백기를 빨았다. 그러자 백기는 사라져 버렸다. 물에 풀어져 버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떠올렸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말을 떠올렸다.
―「제정신세계」 중에서
세상은 뒤집힌 실재인 거지. 실재는 뒤집힌 세상인 거고, 따라서 사건은 빈틈없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거고.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흘러든다는 거지……. 앞뒤가 다른 사물은 좀 치사하다는 거야.
―「용혈수」 중에서
헌신할 대상을 상실한 인간들, 정확히는 폭탄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 인간들은 무엇에도, 세계에도 연연하지 않게 된다. 이따금 물렁해지고 유연해진 폭탄에서 피가 새면, 그때라야 착각처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내 잊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생활이 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폭탄 마니아」 중에서
헤매고 있다 혹시 나의 육체를, 이름도 없이
―「나이트 크롤러」 중에서
메마른 꿈을 고백하면 모래가 지근지근 씹힌다 나는 일순간 백사장의 마음이었다가 이건, 꿈이 아닌가 몇 번이나 태어났으니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은가
―「태몽」 중에서
핀이 싫어. 못도 싫어. 가두고 자르는 거 싫어. 끊어진 계단을 오를래. 차라리 끊어진 거기가 될래. 있다가 사라지다 찰나가 될래. 나만 하는 사랑도 싫어. 둘이나 셋이 하는 사랑은 더 싫어. 담을 넘을래. 정지선을 침범할래. 저촉하거나 부정할래.
―「자화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