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조선인 강제동원의 흔적들은 일본 본토 곳곳에 널리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자료를 수집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곳 하나 참혹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선인 강제동원자들의 참혹했던 실상과 희생자들의 사연, 그리고 광복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이들의 고단하고 억울했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더 불타올랐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공부한 것이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 준비된 운명처럼 여겨졌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카의 말을 기억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이 죽은 역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책이 저자의 개인적 분노 표현에 머물지 않고, 조선인 강제동원에 대해 숙고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책 속으로]
관부연락선은 1905년부터 일본 패전 때까지 무려 3천만 명 이상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정점은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이었다. 1937년부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1945년까지 8년 동안 수송한 인원이 1905년부터 1937년까지 30년 넘게 수송한 인원의 3배에 달했다고 한다. 이 기간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군인과 위안부로 끌려가 동남아시아와 중국 등지의 전쟁터에서 희생됐고 일본 전역의 탄광 등에 끌려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조선인 강제동원의 시작이 바로 이 관부연락선이었던 것이다. 나는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한이 서린 그 항로를 따라 강제동원의 흔적을 찾는 한 달 동안의 일본일주를 시작했다.
-p. 14,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중에서
유네스코가 일본의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23곳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 것은 2015년이다. 이 가운데 군함도, 야하타제철소, 미이케탄광 등 7곳에는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가 뼈아프게 새겨져 있었던지라 한국의 거센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유네스코 대사는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정보센터를 설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고 있음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p. 28, ‘1일 차-오무타 징용희생자 위령비’ 중에서
높이 41m, 길이 145m의 츠가댐은 고치현에서 에히메현으로 전력을 보내기 위해 1941년 착공한 수력발전댐이다. 전쟁으로 공사가 지연됐다가 1951년 완공됐는데, 공사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동원됐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댐 시공사인 호리우치구미가 정부 보고용으로 작성한 문서가 발견됐는데 여기에는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인부 6백여 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었다. 추정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조선인의 성에 글자 한 자를 더 붙여 일본식 이름으로 표기한 기록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씨 성 뒤에 ‘본’ 자를 붙여 김본(金本), 일본 발음으로 가네모토로 표기하는 식이다. 이처럼 창씨개명 수준의 명단 기록은 츠가댐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된 여러 자료에서 발견되고 있다.
-p. 46, ‘4일 차-츠가댐’ 중에서
이 초혼비는 누가 언제 세웠을까. 세운 지 수십 년은 돼 보이는 초혼비를 보니 궁금한 것이 하나둘씩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3년 동안의 공사 기간 중 희생된 조선인이 어디 7명뿐이겠는가. 아마루베철교 조선인 노동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위령비 앞 제단에는 색이 바래고 찢어진 상표가 붙은 익숙한 모양의 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한국산 소주병이었다. 상태를 보니 여기에 놓인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듯했다. 이 소주병을 두고 간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국땅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을 가엽게 여긴 일본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한국에서 온 참배객이었을까.
-p. 67, ‘6일 차-철도공사중 순난병몰자 초혼비’ 중에서
외교부의 『일본 속의 한국 사적』 간행물을 보면, 이 공사에 조선인 140명이 동원됐다고 적혀 있다. 인근 소학교 학적부에 조선인 전입생 47명의 명단이 있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16세에서 50세 정도로 두꺼운 바위산을 뚫는 터널 공사를 모두 수작업으로 했다고 한다. 전쟁 말기 일본은 본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면서 소개령을 내려 전국 각지의 무기 공장과 전쟁 시설을 지하로 옮기는 광기를 부렸고 노다터널도 그 광기의 산물 중 한 곳이다.
-p. 80, ‘7일 차-노다터널’ 중에서
어둡고 습한 지하호를 따라 걸어가니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곡괭이로, 삽으로, 오직 사람의 힘만으로 파냈을 지하호의 거대함에 치가 떨리기도 했다. 모두 조선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만든 시설이 아닌가. 견학 코스가 끝나갈 때쯤 한자로 ‘대구(大邱)’, ‘대구부(大邱府)’라는 글자가 선명한 사진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지하호 어딘가에 새겨진 글씨를 사진으로 전시해 놓은 것이다. 대구에서 끌려온 누군가가 고향을 애타게 그리며 피눈물로 벽에 새긴 글씨, 이곳에서 내가 사는 대구를 볼 줄이야. 그 글자는 마치 번개처럼 내 가슴에 박혀 버렸다. 글자 너머 한 사람의 넋이 여기서 울고 있는 것이다.
-p. 84, ‘8일 차-마쓰시로대본영’ 중에서
지금까지 만난 일본인들은 모두 내 여행에 큰 관심을 보이며 안전을 빌어주고 응원해 줬다. 민간 교류가 활발해져 두 나라 국민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다고 하더라도 한일 관계의 한계는 명확한 것 같다. 결국 매듭짓지 못한 과거가 발목을 잡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한다. 가깝고도 먼 나라, 누가 언제 했는지 알 수 없는 이 말이 아직도 한일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비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p. 98, ‘10일 차’ 중에서
일본이 밝힌 히메관음상의 공식적인 건립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공사의 영향으로 다자와호의 물이 급격하게 산성화되면서 대량 폐사한 토종 물고기를 위로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오랜 옛날 호수 근처에 살던 여자가 영원한 아름다움과 젊음을 갈구하다가 다자와호를 지키는 히메관음이 됐는데 공사로 다자와호가 더럽혀졌으니 히메관음에게 사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 재일교포 미술수집가인 하정웅 선생이 인근 사찰에서 히메관음 건립 취의서를 발견하면서 이 같은 설명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1939년 작성된 건립문에는 공사 도중 숨진 조선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히메관음상을 세웠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p. 100, ‘10일 차-다자와호 히메관음상’ 중에서
홋카이도의 탄광으로, 비행장과 댐 건설 현장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일본 본토보다 훨씬 더 가혹한 노동 환경에 내몰렸다. 고 박경식 선생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에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5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홋카이도로 끌려가 유바리탄광, 비바이탄광 등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고 기록돼 있다. 노동 환경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혹했던 만큼 사망률도 높아 1942년 기준으로 일본 전체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사망률은 0.9%인 데 비해 홋카이도 지역 탄광은 2.1%를 기록했다고 한다.
-p. 111, ‘11일 차-오사리자와광산’ 중에서
댐 옆에 세워진 추도비 뒷면에는 조선인이 연행됐다는 표현과 잔혹한 식민지배에 반성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번 일본일주에서 본 문구 중 가장 직접적인 사과의 표현이다. 강제로 끌고 갔다는 뜻의 ‘연행(連行)’이란 표현도 처음 봤다. 추도비는 히로시마 교직원 조합, 피폭 피해자 모임, 지역 고등학생 동아리 등이 힘을 모아 1995년에 세웠다. 히로시마는 원자폭탄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곳으로 일본에서도 반전, 평화운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 같은 사과와 반성의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p. 198, ‘22일 차-고보댐·오도마리댐’ 중에서
추도광장에서 1km쯤 떨어진 바닷가에 가면 해수면 위에 솟아있는 원통형 구조물 두 개가 보인다. 해저 환기 시설, 그러니까 탄광 노동자들의 숨구멍이었던 피야라는 시설이다. 피야 아래의 바다 밑에는 아직 183명의 유해가 묻혀 있다. 두 나라 정부가 침묵하고 있는 사이 ‘역사를 새기는 모임’을 필두로 두 나라 시민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모았고 유해 발굴을 위한 기초 조사를 광복 79주년인 2024년에 시작했다.
-p. 212, ‘23일 차-조세이탄광 피야’ 중에서
간몬터널은 1939년 착공해 1958년에 완공됐다. 입구 옆에 세워진 ‘간몬터널 건설의 비’는 공사가 늦어진 이유를 ‘우연히 발생한 전쟁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연히? 그 전쟁을 누가 일으켰나?
-p. 219, ‘24일 차-간몬터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