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나병환자를 고쳐주심
(마 8:1-4; 막 1:40-45; 눅 5:12-16)
1. 예수께서는 산 위에서 복음의 법을 전해주신 후에 기적을 행하여 그것을 확인해주셨다: 훌륭한 교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행위로 입증한다. 예수께서 설교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왔다(마 8:1). 주님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셨고,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려 하셨다. 히에로니무스는 “주님이 산에서 가르치시고 설교를 마친 후에 기적을 행할 기회가 생겼다. 그리하여 기적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방금 하신 말씀이 듣는 사람들 가운데서 확인되었다.”라고 말한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께서는 산에서 설교하신 후에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다. 주님의 말씀이 놀라웠고, 행위도 놀라웠다.”라고 말했다. 테오필랙트는 “주님은 행동으로 가르침을 입증하셨다. 만일 주님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말이 무익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가르친 후에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신비적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겸손하게 신적 탁월함의 산에서 인성의 골짜기로 내려오셨다. 신성을 유지하시면서 인성을 취하셨다. 주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다(빌 2:7).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랐다. 하나님이 내려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라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큰 영광이요 권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산에서 새 언약을 주셨다는 것과 복음의 은혜가 율법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려고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다. 율법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지 않고 거부했다. 마태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라고 기록하고, 누가는 “예수께서 어떤 동네에 계실 때에”라고 기록한다(눅 5:12). 주석집에서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것과 어느 동네에 들어가신 일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고 암시한다. 마태는 적절한 장소에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하지만, 누가는 어떤 동네, 즉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가버나움이 동쪽으로 약 2.5km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나병환자가 나아왔고,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시다.
2. 나병환자 한 사람이 믿음으로 나아와 겸손히 엎드려 절하면서 입으로 기도하며 병 낫기를 구했다(마 8:2; 막 1:44; 눅 5:12). 하나님은 믿음과 겸손과 기도로 구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나병환자는 비천한 사람처럼 엎드렸고, 자기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간청이 받아들여져 깨끗하게 될 수 있었다. 기도가 응답되어 깨끗함을 받으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암브로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에 묻은 얼룩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겸손의 표식이므로, 그는 엎드렸다. 그는 수치심 때문에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상처를 보여주며 치유를 간청했다”(눅 5:2).
그는 “만물을 지으신 주여,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으십니다. 주님의 뜻은 효력이 있으며, 주님의 행위는 주님 뜻에 따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깨끗하게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신적 의지에 의해 치유하시는 능력과 권리가 주님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님은 전능하시니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듯하다. 보스트라의 티투스는 “나병환자처럼 육체의 병 낫기를 구하지 말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아시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기자”(눅 5:12-16)라고 말한다. 나병환자는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권위를 신뢰하고 헌신했으므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었다.
3.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어(탐욕스러운 사람들과 맞서는 관대한 행위), 그에게 대시며(교만한 사람들과 맞서는 겸손의 행위) “내가 원하노니(잔인한 사람들과 맞서는 경건한 행위) 깨끗함을 받으라(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겨루는 능력의 행위)”라고 말씀하셨다(마 8:3).
성경에서 나병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치유된다. 첫째, 나아만의 경우처럼 물로 씻음으로 치유되었는데, 이것은 눈물 흘림을 상징한다(왕하 5:1-14). 둘째, 열 명의 나병환자가 제사장에게 보이러 간 데서 알 수 있듯이 보여줌으로써 치유되었는데, 이것은 죄 고백을 상징한다(눅 17:11-19). 셋째, 모세의 누이 미리암처럼 분리함으로써 치유되었다, 이것은 파문을 상징하며, 의학적 목적으로만 시행되어야 한다(신 12:10-14). 넷째,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니 손에 나병이 들었지만,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니 본래 살갗대로 말끔해져 있었던 것처럼, 어디에 소속됨으로써 치유된다(출 4:6-7).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영적 나병환자들이 수도원에 들어감으로써 깨끗해진다. 다섯째,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어 치유해주신 것처럼 접촉에 의해 치유된다.
하나님은 세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만지신다: 육체적인 접촉, 영적인 접촉, 그리고 부분적으로 영적이고 부분적으로 육체적인 접촉. 육체적인 접촉에서는 만지는 사람과 만짐을 받는 사람 모두 몸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경우에 이 만짐이 매우 강력했다. 복음서에 여러 차례 묘사되었듯이 그분은 모든 종류의 질병을 이 방식으로 고쳐주셨다. 영적이요 육적인 접촉에서 행위자는 영적이요, 접촉을 받는 자는 육신이거나 영이다. 이것은 고난의 접촉이며, 매우 효과적이다. 이것은 죄인의 완악함을 억제하고, 육의 욕정을 제어하며, 의인의 인내를 증명해줄 수 있다. 영적인 접촉의 경우에 접촉하는 쌍방이 영이다. 이것은 내적 영감의 접촉이며, 매우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