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 요즈음 청년 세대에게 ‘미군 점령’이라는 말은 생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식민지 조선총독부 건물에는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랐다. 한반도를 분단하고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지배의 편의를 위해 친일파를 보호하고 이용했다. 이에 따라 해방 후 가장 큰 민족적 과제였던 친일파 청산은 실패했고, 이승만을 앞세운 친일파들은 반공을 앞세워 한국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p13)
▶ 미국 군사정부(미군정)는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면서 3년의 직접 통치 기간을 끝냈다. 그런데도 미군은 미군사고문단을 남겨 1949년 6월 말까지 한국을 점령하여 형식적으로 독립한 한국 정부를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사실상 지배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3년이고 미군 점령은 4년이다.(p14)
▶ 미군이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자마자, 곧바로 남조선 전체를 장악해 통치했다고 볼 수 없다. 당시 남조선은 힘의 공백 상태가 아니었고, 민족적 혁명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 미군이 남조선 전체를 점령하려면 이 세력을 파괴해야만 했고, 거기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p23)
▶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고 미국 점령군이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해서 남조선 전체를 사실상 장악하는 1946년 말까지 우리는 해방 민족으로 민주 사회와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다. 민중의 소원인 토지개혁과 친일파 숙청을 부분적으로 실천하면서,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이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동한 해방의 기간이었다. 8월 15일,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함으로써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을 시작했고, 9월 6일, 건준을 재조직해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세웠다. 그러므로 미점령군이 남조선에 도착했을 때 우리 민족은 무정부 상태가 아니었다. 인공은 치안대를 이끌어 사회질서를 유지하면서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수행하고, 전국 각 도·시·군·리 별로 조직한 인민위원회 활동을 지휘하며 사회혁명을 진행했다.(Meade, 1951, p8; Sarafan, 1946, p350)(p107)
▶ 사실 부유한 지주이자 사업가인 자문위원회 의장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고문으로 활동한 적이 있고, 전국에서 미움과 불신을 받았다.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는 동경 헌병사령관의 첩자였다. 이용설은 내선일체 운동에 적극적이었고, 전용순은 조선인에게 몰핀을, 일본 군대에 의료기를 팔아 부자가 되었고, 김동원은 일본 통치 아래에서 평양 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다.(Roth, 1946, p221; 길진현, 1984, p235)
그래서 미군정의 ‘자문위원회’는 유명한 친일파들로 구성된 일제의 중앙자문위원회와 유사했다.(Scher, 1973, p18)
이런 부류 사람들 자문을 받는 미군정은 부유한 친일파와 한민당 지도자들이라는 정선된 집단에 에워싸였다. 1945년 가을, 이전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사람들은 한민당과 미군정이 동맹자라는 걸 확인했고, 한민당 지도자들은 미군정 관료 조직의 핵심을 통제하게 되었다. 즉, 조병옥이 경무부장, 장택상이 수도경찰청장, 김용무가 대법원장, 이인이 검찰총장이 되었다. 이 4명은 이 직위를 1948년까지 유지했고, 남조선에서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p159)
▶ 미군정은 한민당 창당을 돕고 한민당 지도자를 미군정 관료로 두루두루 고용한 뒤에도 몹시 불안했다. 미군정의 동맹자인 보수 국내 우익들이 과거에 친일했다는 경력 탓에,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활력 있는 정치 조직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정 당국자들은 겉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면서 속으로는 미군정을 도울 인물을 찾으려고 애썼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거대한 관료 조직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히고 싶었다.
사실 미군정은 이승만 정권에 권력을 인계할 때까지 미국이 만든 관료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할 믿을 만한 조선인 지도자를 샅샅이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미군정의 지지를 얻었다.(p160-161)
▶ 하지는 미군정을 위해 김구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고깃국에 필요한 소금 같다.”(Journal, 1945년 11월 2일; Cumings, 1981, p192에서 재인용)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김구에게도 특별한 지위와 특권을 주었다. 김구가 서울에 온 다음날, 군정장관은 사령관실에 서울의 신문 기자들을 모아놓고 김구를 소개했다.(Robinson, 1947, p60)
미군정은 덕수궁에 임시정부 본부를 마련해주고, 미군 헌병이 경비를 섰다. 또 교통수단을 제공하고 미군정이 다른 단체에는 무기반납을 명령하고는 김구 개인 수행원이 무기를 지니는 것은 허용했다.(Scher, 1973, p19; Robinson, 1947, p66) (p165)
▶ 미군정이 인공을 조선 정부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공의 활동을 불법화한 것은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 탄압의 서곡이었다. 미점령군은 모든 기회를 이용해 혁명적 민족주의자는 탄압하고 반혁명적 사대주의자는 지원했다. 조선을 신탁통치한다는 강대국들의 계획은 미군정이 민족주의적 반탁운동을 왜곡해 그것을 반공주의 운동으로 변질시키면서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신탁을 둘러싼 혁명적 민족주의자와 반동적 친미파 사이의 투쟁은 남조선 정치에서 민족주의자 우세에서 친미파의 지배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신탁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1945년 12월 28일에 모스크바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 영국, 소련 외상이 서명한 이 선언에 앞으로 5년 동안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조선을 신탁통치한다는 구절 때문이다. (p176-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