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독백의 언어들
문 신
(시인, 우석대 교수)
1. 자맥질해 오는 그리움
모든 예술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늦은 후회를 이야기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들이 돌아보면 삶의 중요한 국면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창조적 상상력이 발휘된다. 이런 사실을 일찍이 간파한 인간들은 오르페우스 신화 같은 ‘돌아봄’에 관한 흥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려오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에게 하데스가 경고하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보지 말라고.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고, 금기를 깨뜨리는 순간 에우리디케는 안타까운 눈빛을 남긴 채 저승으로 끌려 들어가고 만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표면적으로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돌아보는 행위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돌아봄으로써 아련하게 남게 되는 그 깊은 후회의 이야기는 삶에서 이탈하여 시가 되고 예술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서애숙 시인이 회고적인 언술과 그리움의 정동을 시적 동력으로 삼는 것은 그에게 지나온 삶이 얼마나 강렬한 이미지로 존재하는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 시에서 그가 피력하고자 하는 존재의 힘을 찾아볼 수 있다.
돌담 사이
제멋대로 흐트러진 초록
추억 더듬어
뚝 뚝 보고픔 적신다
소곤대는 그림자 뒤로
멀어져 간 발자취
자맥질하며 피어난다
수줍음 올올이 휘감아
추적추적 스며든 오후의 향연
파란 빗금 치며
날갯짓으로 꾹꾹 눌러 재운다
- 「담쟁이넝쿨」 전문
이 시는 “추억”, “발자취” 같은 시어를 통해 지나간 시간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을 감각적으로 완성하고 있는 시어가 “소곤대는 그림자 뒤로”이다. 기본적으로 ‘그림자’나 ‘뒤로’ 같은 시어들이 발생시키는 후퇴 감각은 ‘소곤대는’이라는 미세한 청각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어떤 순간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환기한다. 물론 그럴 때의 그리움은 ‘그림자’에서 알 수 있듯 형체를 규정할 수 없이 모호하다. 하지만 서애숙 시인에게 그리움은 끊임없이 현재의 삶을 부추기는 역동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이 시에서 “올올이 휘감아”, “파란 빗금 치며/날갯짓으로 꾹꾹 눌러” 같은 동적 이미지로 마무리함으로써 ‘추억’이라고 일컬어지는 지난 삶의 흔적들은 오늘의 삶을 강력하게 밀고 가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현재의 삶에서 역동적으로 “자맥질하며 피어난” 그리움의 순간들은 시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봄비로 쓰는 편지」 연작은 과거와 현재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초월하는 시적 공감을 보여주는 특별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가 울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그리움 찾아
그 향기 속으로 걷고 또 걸으며
- 「봄비로 쓰는 편지 1」 부분
나지막이
시인의 손끝으로
허공 긁으며
보고픔에 꺼내 들며
주머니에 담는다
- 「봄비로 쓰는 편지 4」 부분
인용한 시에서 알 수 있듯, 서애숙 시인은 현재와 과거의 삶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형상으로 촘촘하게 바느질해간다. 시인은 “끝없이 펼쳐진 그리움”을 향해 “걷고 또 걸”어가는 중이며, 오늘에 부재하는 그리움의 대상을 찾아 “허공 긁으며/보고픔”을 견디고 있다. 이렇게 시시각각 자맥질해오는 그리움의 순간들은 과거와 현재의 삶을 하나로 이어가는 “시인의 손끝”에서 “서성이는 비밀들”(「능소화」)과 같다. 서애숙 시인은 이렇게 삶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닿을 수 없는 별 하나”(「산다」) 같은 ‘비밀들’을 순정한 시어로 포착해내는 데 능숙하다.
2. 향기 담은 여백 위로
서애숙 시인이 어깨 너머로 흘러 가버린 그리움의 순간들을 향해 시선을 보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움의 기원은 우리에게 새겨져 있는 생물학적 흔적을 향한 본능에서 찾아야 한다.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본능적인 질문이 그리움의 정서로 발현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발견하는 그리움의 대상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실존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어머니’는 모든 존재를 탄생시킨 원천이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로부터 발생했고, 어머니와 결별함으로써 독자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킨다. 인류의 삶은 이렇게 어머니로부터 이탈하여 어머니로 완성되는 연쇄의 과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머니’라는 상징적인 존재는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렇게 탄생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포태하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아궁이에서 투다닥 투다닥
소리 꽃 만발하면
생솔가지 매운 향 피어난다
칠 남매 세 끼 행여 거를까
마당과 텃밭으로
어머니의 몸빼바지는
물결처럼 출렁인다
또 하루 고단한 발길은
새벽 열고
물 젖은 손 마를 날 없다
어느덧 자식 다 키워낸
젖무덤은 말라만 갔다
아직도 나는
어머니 가슴 더듬는
꿈을 꾼다
돌아보는 길목마다
어머니의 사랑 메아리 되어
눈시울 젖는다
오늘은 유난히 맑은
당신의 영혼처럼
하늘 냄새 맡으며
여전히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 「붉은 사랑」 전문
근대화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어머니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체험적으로 안다.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여자라는 개인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는 우주였다. 그 시절 어머니는 “칠 남매 세 끼 행여 거를까” 노심초사하면서 “물 젖은 손 마를 날 없”는 삶을 살았다. “마당과 텃밭으로” “고단한 발길”을 오가며 자식을 키워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젖무덤은 말라만 갔”고, 결국에는 “꿈”에서나 더듬어보게 되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움 속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해진 옷고름 여미며/나직나직 밟고 와/문 두드리며 안부 전하”(「어머니」)고, “하염없이 창가에서/토닥토닥 내 가슴 두드”(「비 오는 날」)려 주는 존재다. 서애숙 시인은 이렇게 가슴 두드리는 하염없는 순간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울음’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심연의 공명(共鳴)으로 전환해낸다.
홀연히 어렸을 적
그 긴 울음으로 재워 놓는다
가련한 세월만큼이나
한없이 허우적거리며
갈팡질팡 쉼표 찾는다
아픈 목덜미 타고 올라와
향기 담은 여백 위로
가냘픈 몸 풀면
슬그머니 일어난다
소리죽인 울음 하나
서 있는 저 추억처럼
- 「함께 하는 그리움 하나」 전문
‘울음’이란 우리 인간이 가장 처음으로 자기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는 행위이자 자기를 탄생시킨 어머니를 간절하게 부르는 행위이기도 하다. 서애숙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울음 이미지를 자주 드러내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울음 이미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향기 담은 여백”의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울음은 우리의 삶이 여백으로 비워놓은 그리운 존재의 향기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독 뒤 엄마의 젖줄은/노을강 되어 눈물짓는다”(「봉선화」)에서처럼, 울음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의 “뒤”에서 오늘의 배경이 된다. 서애숙 시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바로 그런 역할, 즉 삶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그런 까닭에 서애숙 시인은 자기의 삶을 “엄마가 남긴/주소지”(「토끼풀」)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3. 여과되지 않은 상흔들
남겨진 존재 혹은 남겨진 세계에 관해 믿음직한 통찰을 보여주는 서애숙 시인의 어법은 결 곱게 여과되기보다는 날것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숨결은 시를 읽는 독자의 실핏줄을 바르르 떨게 하는 여진으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그의 시는 “푸른 잎 사이로 일렁이는 음률”(「석류」)과 같고, “소곤소곤 들녘으로 내딛는 밀어”(「밀어」)와도 통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러한 ‘음률’과 ‘밀어’가 보이지 않는 상흔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음률은, 알다시피, 모든 생명을 살아 있게 만들어주는 힘으로서의 리듬이다. 존재의 내면에서 울리는 음률의 파동은 그 강력한 힘으로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한다. 그런데 음률이 가장 격정적인 삶의 의지와 맞닿아 만들어내는 파문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커질수록 우리 내면의 음률은 진폭과 파장이 높아진다. 가슴 벅차고 마음 설레는 일이 그렇다. 우리 내면에서 현기증 나게 밀물져 오는 음률의 감각이 삶을 향한 역동적인 의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밀어’는 음률이 일으키는 내적 파동의 정체를 확인하고, 그 떨림을 자기에게 고백하는 언어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밀어는 다른 누군가를 향한 언어가 아니라 자기를 확인하고 자기를 증명하는 자기의 언어인 것이다. 이 점이 밀어를 시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밀어와 시의 언어는 내밀하고 순정하며 그 안에 도무지 해석되지 않을 비밀을 간직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서애숙 시인의 밀어는 이러한 끌림의 역동을 단정한 어법으로 형상화한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 실린 서애숙 시인의 시어는 자기 삶이 간직하고 있는 그리움을 향해 파문을 만들어내는 끌림의 밀어와 다르지 않다.
풀벌레 고뇌에 화상 입은 연민
흔적 더듬어가는 소실점
바람은 기댈 곳 없이 헤매고
여울은 보고픈 이름
어두운 그림자에 간직한다
여과되지 않은 상흔들
메마른 노을에 붉게 타오르고
심연에 떠오르는 초승달만
애달프다
- 「회상」 전문
이 시는 “고뇌”로 가득 찬 “심연”을 이야기한다. “화상”, “어두운 그림자”, “상흔들”, “메마른 노을” 같은 시적 대상이 동원되면서 한 개인의 고뇌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형상화했다. 그렇지만 서애숙 시인은 이러한 고뇌가 자기 심연을 전면적으로 장악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모든 고뇌의 순간들이 삶의 “소실점”을 향해 사라지도록 만든다. 이때 소실점은 삶을 이끌어가는 역동적인 파문이 밀어의 속삭임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삶의 극적인 순간마다 “여과되지 않은 상흔들”이 바로 이 소실점에서 “붉게 타오르”게 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마지막 연에 형상화된 “심연에 떠오르는 초승달”은 소실점에서 삶의 ‘상흔들’을 불태우고 새롭게 탄생한 삶을 향한 의지적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초승달이 “애달프”게 보이는 이유는 초승달이 “여과되지 않은 상흔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연에 떠오르는 초승달’은 모든 존재의 “가슴에 숨겨진 세월”(「계절의 길목」)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초승달이라는 구체적인 형상물은 우리 삶에서 비롯된 ‘고뇌의 상흔’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상징적인 사물이 되는 것이다. 서애숙 시인은 그와 같은 고뇌의 상흔들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노을 걸음 익히며
가을을 위해 편지를 쓴다
그늘은 눈부시게 하늘 바라보며
또 묻는다
떨고 있는 작은 씨앗들
조금이라도 건들어 보았는지
그리움 속에 사는 여정
아무도 모르게 흔들리고
썰물이 되면
누가 발가벗고 헤엄치는가
가장 깊은 곳에
누굴 담아 가려고 침묵 걸치나
서럽게 흔들리는 체온 너머로
얼기설기 새겨진 추억
혜움길 따라
희로애락 물들이고
가을은
조금만 건들어도 우수수 몸을 떤다
숨겨진 일기장처럼 노년의 걸음 익히며
여백 위에 내디디는 가을을 펼쳐 보이니
흔들리는 옷 벗고
고즈넉한 물그림자 꽃잎 띄워
조용히 노닐고 싶다
- 「예순의 노트」 전문
이 시를 살아 있게 하는 건 고뇌의 상흔들이 만들어내는 떨림의 파동이다. 특히 “떨고 있는 작은 씨앗들”은 “그리움 속에 사는 여정”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읽힌다.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는 삶은 떨림을 간직하고 있는 씨앗들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한 그리움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으면서 언제든 자기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가능성인 “침묵”으로 존재한다. 물론 그러한 침묵을 깨우는 건 “서럽게 흔들리는 체온”, 다시 말해 고뇌의 상흔들이다. 그 상흔들은 “조금만 건들어도 우수수 몸을 떤다”. 이 떨림이 “희로애락 물들이”는 파동이 되고, 우리는 그러한 파동의 힘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파동의 끝에서 피어난 “고즈넉한 물그림자 꽃잎”은 고뇌의 상흔들 속에서 예순의 삶을 살아낸 서애숙 시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애숙 시인은 존재의 심연에 침묵하고 있는 그리움의 대상을 흔들어 삶의 전면으로 호출하고,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희로애락’의 매 순간을 믿을 수 있는 언어로 부조(浮彫)해낸다. 그것은 시의 언어로 캄캄한 밤하늘에 ‘초승달’을 새겨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한줄기 풀잎처럼 가냘프게 보이지만, 시간의 손길이 차츰 빛의 형상을 다듬고 넓혀가면서 달의 형상을 키워가는 것처럼, 서애숙 시인은 ‘작은 씨앗들’에 불과했던 그리움의 감정을 흔들고 일깨워서 마침내 자기 삶을 오롯이 견뎌낸 ‘꽃잎’의 형상으로 완성해낸다. 그럴 때 시인은 “꽃을 빚는 영혼”(「그날처럼」)으로 독자들 앞에 존재하게 된다.
4. 가슴에 숨겨진 세월
못다 한 독백은
유리창을 통과하지 못한 채
흔들리는 달빛에
그리움을 먼지로 날린다
마디마디 끊어질 듯한
어둠은 울음을 삼키고
시간을 응시하는
너와 나
사이사이 일그러진 아우성
긴 기다림의 그림자로
입술이 달빛 머금는다
- 「시간 속에서」 전문
이 시는 그리움이 “긴 그림자의 기다림”으로 완성된다는 시간의 미학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달빛에/그리움이 먼지로 날린다” 같은 구절은 시간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였으며, ‘달빛’을 전면에 내세워 우리의 삶이 달의 변화처럼 ‘희로애락’의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서애숙 시인이 그리움의 감각에 매몰되어 지나간 시간 속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니다. 존재의 “일그러진 아우성”을 “긴 기다림의 그림자”로 전환해냄으로써 그의 시는 그리움을 지금-여기의 삶으로 바꾸어낸다. 그리하여 “그리운 길이나 외로운 길/고독한 길도 다독이며/예쁜 동행 해야겠습니다”(「송년 즈음에」)라며 각오를 다지고, 최종적으로 “푸름 꿈이 채워지는/아름다운 시간”(「동행」)을 꿈꾼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그리움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음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럴 때 우리는 심연에서 아우성치는 존재의 파동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우리 삶이 간직하고 있는 그리움을 “한 땀 한 땀 아로새겨/아름다운 중심”(「깊은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때 ‘아름다운 시간’을 채워가는 ‘아름다운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 눈부신 아침이 되면
작고 여린 심장 하나
풀꽃 되어 다가온다
잘 익은 초록은
뼈와 살이 되어 밟힌 채
촘촘히 지문 일고
일탈을 꿈꾸는 입술
조심조심 꽃잎 빚는다
땅속 깊이 묻힌 너의 영혼
꺾이지 않는 꿈 캐어 시들지 않고
한없이 여리게 떨고 있는
나는
풀꽃으로 살고 싶었다
- 「풀꽃이었다 나는」 전문
시를 쓰는 일은 최종적으로 ‘나’의 삶을 돌아보고, 그 안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해가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시를 쓰게 되면 누구보다 자기에게 솔직해질 수 있고, 그만큼 자기를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서애숙 시인이 그리움의 정동을 계속해서 시로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심연에서 아우성치는 그리움의 음률에 온몸으로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적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난 시가 「풀꽃이었다 나는」이다.
이 시에서 서애숙 시인은 매일 아침 “작고 여린 심장 하나/풀꽃 되어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가 바라보는 ‘작고 여린 심장’은 “땅속 깊이 묻힌 너의 영혼”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모습이다. 즉, 이 시에서 ‘심장’과 ‘영혼’은 서로 다른 대상이 아니라, “일탈을 꿈꾸는 입술”로 발화됨으로써 “조심조심” 빚어낸 “꽃잎”이자 “풀꽃”으로 수렴되는 대상인 것이다. 이렇게 심장과 영혼으로 빚어진 ‘꽃잎’을 서애숙 시인의 시라고 하면 과장일까? 그렇지 않다. 이 시는 존재의 심연에서 아우성치는 그리움(작고 여린 심장, 너의 영혼)의 대상들을 시적 언어(일탈을 꿈꾸는 입술)를 거쳐 ‘꽃잎’이라는 시로 빚어내는 과정을 아주 정밀하게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창작된 시가 시인의 “꺾이지 않는 꿈”이고, 그 꿈이 은유적으로 형상화된 대상이 ‘꽃잎’, 즉 ‘풀꽃’이다. 이때 ‘풀꽃’은 “뼈와 살이 되어 밟힌 채/촘촘히 지문 일”어나는 어떤 삶의 형상을 말한다. ‘뼈와 살’이 희로애락을 살아온 인간의 삶을 제유한다고 할 때, 삶이 ‘지문’으로 형상화되는 과정은 “헤아리지 못한 삶의 흔적”(「계절의 길목」)을 발굴하는 일이 되고, 우리의 심연에 새겨진 삶의 ‘지문’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는 일이 된다는 뜻이다. 그럴 때 삶의 ‘지문’과 ‘풀꽃’은 존재의 심장과 영혼이 빚어낸 한 편의 시와 다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서애숙 시인의 시는 그의 삶이 피워낸 꽃이자 언어로 새겨놓은 존재의 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마땅히 그의 시를 읽는 일은 그가 살아온 삶의 지문을 헤아리고, 그 지문에서 그의 심연에 살아 있는 삶의 비밀을 발견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물론 시가 심연에 묻어둔 고뇌의 상흔들을 언어로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럴 때 표현되지 못한 이야기를 우리는 존재의 여백이라고 부른다. 오르페우스가 무심코 뒤돌아보았을 때 안타까운 눈빛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에우리디케의 모습처럼, 우리 삶은 등 뒤에 그리움이라는 존재의 여백을 남기는 법이다. 서애숙 시인의 시는 바로 그 “때 묻지 않은 여백”(「봄비로 쓰는 편지 4」)과 “향기 담은 여백”(「함께 하는 그리움 하나」) 위에 새겨놓은 삶의 지문이다. 이를테면 그의 시는 “초록비 구겨 여백 위에/가늘게 나누어” “토해낸” “비밀”(「4월의 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서애숙 시인의 시집을 읽으려면, 시인이 시의 언어로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한 존재의 여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의 시가 “살포시 밀어 올린 그리움”과 “달빛 속에 감춰둔 그리움(「능소화」)의 세계”에 늦지 않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