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존재는 긴 시간 같은 자리를 지켜낸 것만으로, 거기 잘 있는 모습만으로 환대 같다.
경계에서는 그런 종류의 만남도 일어난다.
_24쪽, 「공항 검색대에서」
국경은 약속의 공간이다.
여권, 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무게와 그것을 확인하는 저울과 쇠붙이 탐색기, 질문들, 친절하고 또 무서운 질문들. 유효하지 못한 자를 가르는 체계와 환대의 말이 같은 장소에서 흐르므로 우리는 공항에서 조금은 헷갈린 채 돌아온다. 떠나는 사람들도 똑같다. 떠나는 자는 반드시 새 국경으로 들어선다. 땅을 떠난 발은 어디든 결국 다시 딛게 된다. 떠나는 자는 도착하는 자다.
_26쪽, 「국경의 이름들」
어떤 날은 시간이 우릴 두고 혼자 간다. 어떤 날은 함께 가자고 기웃댄다. 그리고 누가 보든 안 보든 이 바다와 돗자리와 우리 안의 케이크들을, 바다 밑 수천 개의 암초를 같은 속도로 통과한다. 시간에 대한 우리 입장은 전부 다르고 그는 그저 우릴 다녀갈 뿐이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시간의 흐름을 가만히 지켜본 게. 통과하는 것들을 통과하도록 둔 게.
우리는 이곳에서 긴 계절을 보낸 사람들처럼 눈을 감았다 뜬다.
_30쪽, 「국경의 이름들」
밤아침은 이슬아가 만든 말이다. (이슬아가 밤에 입장할 때 이훤은 아침을 맞는다.) 밤아침이란 단어가 나는 조금 뭉클하다. 둘의 시간을 동시에 호명해주기 때문이다. 두 대륙의 시간은 보통 ‘여기 한국 8시, 거기 밤 11시’와 같이 나뉘곤 한다. 그런 선택은 우리 시간이 뒤집어져 있음만을 상기한다. 슬아가 처음 밤아침이라 말했을 때 이곳과 그곳의 시간을 나누지 않고 불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뒤집어져 있지만 우리가 나란히 존재한다는 안부처럼 다가왔다. 그 제스처와 마음 씀이 고마웠다.
_34~35쪽, 「우주에서 가장 감자적인 인간이 되어」
뒤집힌 시간은 특수한 우정을 만든다. 아침과 저녁에만 만날 수 있는 조건에서 시작된다. 새벽까지 깨어 있지 않은 이상 서로의 오후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만나려면 1년씩 기다려야 하고 즉흥적인 식사도 축하도 위로도 어려운 우정이 된다. 이렇게 쓰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이 같다. 그러나 우린 일말의 무력감 없이 이 우정을 잘 해내고 있다. 일상적인 모든 불가능성을 잘 수용하는 우정.
_35~36쪽, 「우주에서 가장 감자적인 인간이 되어」
타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익숙한 질서를 포기하는 일이다. 세계를 부르는 순서도 리듬도 감각도 달라진다. 무의식보다 의식에 의지해야 한다. 존재하기 위해 조금 더 정성스러워져야 하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기 위해 더 많은 수고를 치러야 한다.
근데 언어가 원래 조금은 수고스러워야 하는 거 아닌가?
언어는 사람을 불러오는 거의 모든 방식이어서, 발휘하는 언어만큼만 우리가 구현된다. 민첩한 비언어가 해내는 일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 성취하는 건 언어니까. 언어만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그리 생각하면 언어 앞에 부지런해지기가 조금 더 쉽다.
_37쪽, 「우주에서 가장 감자적인 인간이 되어」
내가 모를 때도 나를 움직이는 언어를 계속 찾고 있다고 느낀다. 만났을 땐 본능적으로 움켜쥔다. 그게 타국어든 모국어든. 언어가 곧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언어를 갱신하지 않으면 타인의 언어로 살게 된다. 우리가 물려받은 말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내 안에 머물지만 오늘 나와 불화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가. 불온한 마음에서 시작된 말은 또 얼마나 많은가. 솎아내는 일은 중요하다. 정신이 낡지 않기 위해 언어 또한 벼려야 한다.
다시 보기 위해서인 동시에 잘 충만해지기 위함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명장면은 어떤 형태로든 언어를 거쳐간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에 동참하는 첫 번째 방식이다.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_37~38쪽, 「우주에서 가장 감자적인 인간이 되어」
슬아와 있을 땐 그런 느슨한 지지를 받기 때문에 조금 더 용감해진다. 그래도 괜찮은 것 같다. 그가 이미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해져도 된다고 스스로를 놓아줄 때 그 주체와 주변 모두 자유로워지는 광경을 나는 우리 우정에서 자주 경험했고, 그 역설을 여러 밤아침 동안 환기받고 싶다.
_43쪽, 「우주에서 가장 감자적인 인간이 되어」
이민자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이민자의 얼굴은 모두 다르다. 동시에 나는 평균보다 치열하게 사는 이민자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자신에게 자격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존재를 자꾸 증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아는지. 모든 소수자는 비슷한 이유로 눈치를 본 적이 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어떻게든 저를 발휘하려고 고된 일을 도맡은 적도.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눈치를 보지 않고도 어디서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_57~58쪽, 「내가 잘 안 보인다는 감각」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우리가 조금 더 너그러워지면 좋겠어. 우리도 여러 번 용서받았다는 걸 기억하면서.
_68쪽, 「눈 뜨면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있는」
이 동네에는 그런 사람들이 산다. 눈동자만 보이는 고양이와 작은 할머니와 할머니의 개, 언니, 부지런히 쓸고 닦는 언니, 거길 지나는 이주민들 그리고 활자 중독 사장님. 그들이 모여 만드는 언덕을 본다. 속도와 기울기가 다른 생활이 쌓이면 동네가 된다.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는 동안 노인이 노인을 만나는 동안 지하 세계에서 대학생들이 떠들썩하게 한 치 앞도 모를 미래를 도모하고 체육 선생님 목소리가 운동장을 관통하는 동안 그들이 만드는 능선은 정릉에서도 여기만 있다.
_138~139쪽, 「크고 작은 나의 집」
사랑이 좌표를 옮기며 어떤 면들은 남겨지고 어떤 낯들은 버려진다. 좌표를 따라 움직이는 우리가 모여 사랑은 새 몸이 생긴다.
_162쪽, 「좌표를 옮기는 사랑」
오래된 기분이 생각난다. 거의 어느 타인도 불편하지 않았던 언젠가의 기억. 이별하려 애쓰지 않고 모두와 조금씩 함께였다. 손을 적당히 세게 맞잡은 채 살았다. 함께 지켜보는 불꽃은 어딜 가나 있었다. 보인다고 해서 내 것은 아니다. 불꽃은 어디서든 보였지만 자주 멀었다. 그래도 보인다는 게 중요했던 것 같다. 도착하지 못할 걸 알아도 미룰 수 있으니까. 도착을 생각하지 않아서 유효했던 관계로부터 빠져나온 사람이 타인을 더 사랑하게 되는 순간에 대해 듣는다. 우리는 조금 더 유능했던 걸까, 미숙했던 걸까. 지금 저 섬광을 지켜보는 이들은 어떤 폭죽을 들고 미숙하기로 할까, 유능하기로 할까.
_194쪽, 「너무 많은 언어를 이해하는 기계」
보고 싶지 않아도 너무 많은 것을 보게 되는 세계에서도 어떤 이미지는 흐른다. 천천히 흐른다. 천천해서 우릴 멈추게 한다. 시각언어는 크고 작은 뉘앙스가 복잡하게 뒤엉킨 호수다. 몸을 담근 누군가 이전과 조금 달라진 채 그곳을 빠져나간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우리가 만난 언어로 인해 변한다. 이미지에 열광할 때도, 미울 만큼 그것이 싫을 때도. 호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떤 의미도 훼손하지 않은 채 그 앞에 관전자로 남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호수는 어떠한 해석이나 동참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욕망할 뿐이다. 우리는 변모하고 싶다. 발화를 요구하지 않는 발화 앞에서도, 응답을 바라지 않는 부름 앞에서도. 동시에 변화가 무섭다. 그 성질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사적으로 사진이라는 매개를 찾았다. 찾고 있다. 다시 그 안으로 헤엄친다.
_202쪽, 「너무 많은 언어를 이해하는 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