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을 통해 근현대 지식장을 검토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에서 형성된 서학을 ‘전달’과 ‘수용’이라는 단선적인 시야에서 포착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이다. 서학은 서양인들로부터 동양에 비해 진보한 지식을 ‘전달’받아 ‘수용’하는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조선 유학계 내부에서 기원한 논제들을 새롭게 해명하려는 학자들의 선별적 ‘선택’과 서학서의 이론과 개념을 유학 내부로 환원하는 ‘변용’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서학이라는 새로운 자원을 선택해서 연구했고, 이를 자신들이 다루던 학술적 주제 안에서 새로운 자원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기론과 심성론이라는 경학의 관점에서 서학을 검토한 이익이나 정약용 같은 유학자들의 경우뿐 아니라 서교에 대한 국가적 탄압과 금지가 확정된 이후인 19세기 중반에 서양 수학과 천문학을 연구한 남병철, 남병길 형제나 백과전서적 관심으로 서학 정보를 재배치한 이규경,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서학을 활용한 최한기 등 19세기 학자들에게서도 확인되는 특징이다.
기존의 연구는 이익이나 정약용 등 남인을 중심으로 한 서양 지식의 수용과 변용을 다루거나 혹은 교회사적인 맥락에서 천주교의 유입에 따른 조선 지식인들과 중인 이하 민중들의 반향과 그에 따른 국가에 의한 탄압과 그 정치적, 사회적 파장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근현대라는 시점과 공간을 설정해 서학을 연구할 경우 그 연구의 범위와 대상은 새롭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근현대라는 시간적 범위에 따라 서학의 검토 범위 역시 20세기 초반까지로 확장되어야 한다. 주지하듯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중영 전쟁 이후 중국과 서양의 접촉과 대면은 새로운 국면을 형성했다. 조선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인들도 서학서 속의 문장이 아니라 이양선異樣船을 통해 서양을 대면해야 했고 무력 충돌 등을 거치며 결국 조선 안에 들어온 서양인들을 직접 상대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 시기 서양과 서학에 대한 유학자들의 대응 역시 전 시대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서학 연구 대상의 범위를 새롭게 조정하도록 요구한다. 무엇보다 서학에 개입한 주체들을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세기 이후 조선에는 서학을 연구해서 유학에 적용한 학자, 천주교에 대한 신앙에 이르러 직접 호교서를 저술한 학자, 서학을 새로운 지적 자원으로 활용해 지식을 확장한 학자, 정학으로서 유학의 관점에서 서학을 배척한 학자 등 서학에 개입한 학자들의 성격과 목적, 지향이 세분화된다. 본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연구의 출발이자 지향으로 삼아 근현대 유학에 대한 서학의 파장을 여러 각도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