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1863년 11월 19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게티즈버그에서 이처럼 매우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심오한 문장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했다. (…)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은 남부의 노예 제도를 어떻게 평등의 이상과 양립시킬 것인가 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딜레마에서 비롯되었다. 노예 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연합은 그것이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북부의 폐지론자들은 도덕적인 이유로 노예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링컨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은 그 출발점이었던 남북전쟁의 망령만큼이나 지금도 미국 민주주의에 깃들어 있다. _본문 6쪽
“민주주의는 오래 지속된 적이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낭비적이고 소진되어 사라집니다. 자멸하지 않은 민주주의 국가는 없었습니다. 민주주의가 귀족정이나 군주제보다 덜 덧없고 덜 자만하며 덜 이기적이고 덜 야심 차고 덜 인색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고, 역사상 그런 적도 없습니다. 정부의 형태가 어떠하든 인간은 그러한 열정을 똑같이 가지고 있고, 그 열정이 제어되지 않으면 사기, 폭력, 잔인함과 똑같은 결과를 낳습니다.”(존 애덤스) _본문 17쪽
미국은 스스로 엘리트가 지배하는 공화국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전쟁으로 군주제인 영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미국에 강한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스스로 특별한 정치 체제이자 국가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왕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미국 공화국은 보편적인 모델이 되기를 바랐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공공의 것’에서 많은 사람을 배제했으면서도 특별하고 보편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고 확신했다. 노예 제도가 있다는 것이 물론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 이처럼 공화제의 이상과 노예 제도가 동시에 존재하면서 근본적 모순이 생겼다. 그들은 어떻게 대농장에서 매일 마주치며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_본문 20쪽
한편 많은 북군파가 전쟁이 끝난 뒤 남부에 정착했고, 현지 주민들에게 경제와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가르치려 했다. 남부는 1877년까지 계속된 ‘재건’ 기간을 극심한 모욕과 북부의 ‘점령’으로 경험했다. 남부연합 지지자들은 남부연합을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라는 신화로 만들었다.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정당한 대의를 추구했다는 뜻이다. 전쟁 이전의 세상은 그들에게 황금기였다. 그들이 보기에 노예는 법적 지위가 낮아도 남부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고, 어쩌면 ‘해방’되기까지 했을지 모른다. 결국 남부군의 깃발은 백인이 영원히 지배하는 남부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부심을 상징하게 되었다. _본문 22쪽
그러나 되돌아보면, 당시 미국의 보편주의는 청교도 주지사 존 윈스럽이 마태복음에서 가져온 이미지로 압축된다. 그것은 바로 누구에게나 보이는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다. 나머지 세상이 미국의 정치 모델과 공화국 가치를 따를 수 있도록 미국은 먼저 국내에서 완벽한 사회를 건설해야 했다. _본문 41쪽
많은 역사학자가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이야말로 미국의 확장주의를 낳았다고 평가한다. (…) 국외 개입이 있을 때마다 지도자들은 쿠바에 개입했던 이 전쟁에서 만들어낸 ‘정당한 전쟁’이라는 논리를 앞세웠다.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확장할 수만 있다면 힘과 폭력을 사용해도 무방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토머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유럽에 민주주의를 영원히 뿌리내리게 하고 모든 권위주의 제국을 사라지게 할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라 선언했다.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을 때와 베트남 및 중동에 개입할 때도 정확히 같은 논리가 사용되었다. _본문 46쪽
[많은 역사학자들이] 당시 미국 사회에 ‘미국 예외주의’와 ‘문명화’ 사명에 대한 믿음이 팽배했음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실제로 미국의 공공 영역과 정치 영역에서 종교의 무게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미국은 종교적 중립을 표방하는 국가도 아니고, 교회의 기능을 민간에 이양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미국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며, 모든 연설을 공식 표어인 ‘우리가 믿는 신 안에서(In God we trust)’로 끝낸다. 20세기 내내 미국의 정치, 노조, 단체의 지도자 대다수는 미국이 세계에서 메시아 역할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가 반기독교적인 악이라고 믿은 많은 미국인이 처음에는 ‘절대 악’을 물리치기 위한 미군을 베트남에 파병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_본문 49쪽
‘아메리카 퍼스트’는 두 가지 보완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슬로건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슬로건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있었던 보수주의적이고 고립주의적인 운동을 연상시킨다. (…) 게다가 ‘아메리카 퍼스트’는 트럼프의 지정학적 선택을 보여주는 표현이지만 이미 오바마가 구상했던 전략이다. 두 대통령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9.11 테러 이후 호전적으로 변한 미국과 단절하기를 바랐다. (…) 그러나 그들의 신고립주의는 상반된 형태를 띠었다. _본문 71쪽
위계를 중시하고 공산주의를 열렬히 반대했던 닉슨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새로운 면을 싫어했다. 그는 1968년 ‘침묵하는 다수’를 앞세워 선거 유세를 벌였다. 사실 길거리나 언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국기를 불태우거나 베트남 전쟁을 비난하고 브래지어를 찢는 ‘좌파’ 젊은이보다 침묵하는 다수가 더 많다는 것이다. _본문 84쪽
1968년에 베트남 전쟁, 자본주의, 닉슨 출마를 반대했던 많은 대학생 시위자 중 사망자들이 나왔다. 대학에서 ‘미국 예외주의’는 그 뜻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윌슨 대통령과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한 뜻과는 정반대로 미국은 민주주의 체제로 볼 때 나머지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라면 극도의 폭력과 지배, 탄압이 지속적으로 자행된다는 점이었다. 대학생들과 일부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역사를, 식민지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졌던 원주민 학살로 시작된 끊임없는 폭력의 사슬로 요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에 미국의 역사를 ‘거꾸로’ 다시 읽는 현상은 펜타곤 문서가 발견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_본문 87쪽
미국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미국인들은 완벽했다고 믿었던 자신들의 제도가 민주주의의 이상에 반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제정한 헌법도 지도층의 부패와 결탁을 막을 수 없었다. (…)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러한 혁신의 희망을 상징했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이내 수많은 경제 난관에 부딪혔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큰 타격을 입은 미국은 1930년대 이후 최대의 경제 위기를 겪었다. (…) 이처럼 많은 긴장 상태로 카터 대통령은 갈 길을 잃었고, 1979년 7월 15일에는 급기야 ‘불안감 조성 연설’이라 불릴 정도로 처참한 텔레비전 연설을 했다. _본문 92쪽
많은 대선 후보가 그랬듯이, 레이건도 자신이 당선되면 건국의 아버지들이 원했던 ‘진짜’ 미국을 부활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 배우 출신인 그는 미국의 ‘영원한’ 원칙들을 매우 간단하면서도 세련되게 재표현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예를 들어, 그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다. (…) 1984년 미국인들은 “미국에 다시 아침이 찾아왔습니다”라는 선거 광고를 보고 레이건을 다시 대통령으로 뽑았다. 레이건은 재임 기간에 민주주의와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연방주의의 이름으로 복지 정책을 후퇴시켰다. (…) 1981년 1월에 있었던 취임 연설에서 그는 이미 노선을 알렸다.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연방 정부는 우리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연방 정부 자체가 문제입니다.” _본문 93쪽
무역센터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 당황한 조지 W. 부시의 모습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다음 날부터 전쟁 지휘관으로 변했다. (…) 다른 많은 보수주의자처럼 그도 9.11 테러를 메시아 사상으로 해석했다.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일 뿐만 아니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기독교를 겨냥한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선(善)의 문명’ 미국은 다른 대륙에도 민주주의를 완전히 뿌리내리게 할 사명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레이건 재임 기간처럼 부시 행정부의 지정학적 관점은 이분법적이면서도 종교성에 물든 용어로 표현되었다. _본문 110쪽
또한 국외에서 벌이는 전쟁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부메랑 효과’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1941년 12월 7일 이후 미국은 수백만 명의 징병 군인과 직업 군인을 동원하는 해외 원정을 멈추지 않았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처럼 미국 사회와 정계는 지난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귀향으로 ‘야만화’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는 예비군과 현역 200만 명, 퇴역군인 1600만 명이 살고 있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거나 봉사를 마친 이 1800만 명의 군인은 가족과 경제 네트워크에 재편입되었다. 이들은 공공 영역에도 많이 진출했다. 이는 민주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지난 20년간 미국의 정치판은 매우 이례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_본문 116쪽
21세기 초부터 미국을 전쟁 중인 국가로 여기는 미국인이 많다. 전쟁이 국경 밖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 이러한 군사화가 미친 영향은 군대와 군사 경제가 자리 잡은 남부, 중서부, 서부에서 특히 더 컸다. 군사 기지가 많은 몬태나주가 대표적인 사례다. 주민은 대부분 백인이고, 20년 전부터 정치 논쟁은 이민, 이슬람, 세계 멸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양극으로 갈라져 벌어지고 있다. 몬태나주 출신의 퇴역군인들이 이러한 정치 논쟁의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의 유일한 외국 경험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의 전쟁터로 한정되므로, 귀국할 때는 미국을 제외한 세상은 극도의 폭력과 미국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감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2016년 몬태나주의 유권자들이 트럼프의 신고립주의 정책을 지지한 일은 그리 놀랍지 않다. _본문 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