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어, 낭만, 마법적 깨달음으로 가득한
한 풋내기 소년의 위태롭고 아름다운 성장기
영미문학의 거장 피츠제럴드의
가장 자전적 인물을 국내 초역으로 만나다
미국 재즈 시대와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대표하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연작 단편소설집 『바질 이야기』를 국내 처음으로 소개한다. 『바질 이야기』는 피츠제럴드가 1928년 4월부터 1929년 4월까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연재한 연작 소설로 한 편당 약 3,500달러의 고료를 작가에게 안겨주었으며, 재즈 시대 미국 젊은이들의 생활과 문화적 면면을 탁월하게 녹여 냈다는 평을 받았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대개 어느 정도 작가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이 책의 주인공 바질은 유독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인물이다.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인물이나 장소, 사건이 다수 등장하여 피츠제럴드의 청소년기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바질은 청소년기 특유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기복과 예민하고 도취적인 성향으로 곧잘 문제에 휘말리고 마는 중산층 소년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는 고수지만 사랑을 하는 일에는 어리숙해서 많은 실연을 겪고, 언젠가 화려한 미국 동부에 진출해 모두가 우러러보는 위인이 되리라는 야심에 잠겨 혼자 히죽이기도 한다. 곳곳에 녹아 있는 유머에서는 피츠제럴드의 장난스런 웃음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피츠제럴드만의 고유한 감수성을 그대로 빼닮은 바질은 곧잘 사색과 문학에도 심취한다. 무언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일에 거침없이 뛰어들고 그 씁쓸한 뒷맛을 홀로 감내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피츠제럴드이면서 피츠제럴드가 아닌, 모든 10대 청소년을 상징하면서도 전연 색다르고 낯선 인물에 깊은 연민과 공감을 느끼게 된다.
[본문에서]
“바질은 생전 처음으로 나이가 더 많았으면, 감수성이 덜 예민했으면, 쉽게 감명받지 않았으면 하고 절실히 바랐다. 이렇게 모든 향기와 광경과 곡조에 전율하는 대신, 심드렁하니 냉정을 지키고 싶었다. 아름다운 온 세상이 달빛처럼 쏟아져 내려 그를 짓누르는 듯한 비참한 기분이었다. 무수한 어른들이 인생의 수년을 바쳤을 청춘이 과도하게 넘쳐흘러 바질은 속수무책으로 허우적거리며 한숨을 쉬듯 짧은 숨을 뱉었다.”
『위대한 개츠비』나 『낙원의 이편』 같은 피츠제럴드의 장편에서 볼 수 있는 요소, 즉 부와 계급의 퇴폐적 이면과 사랑을 향한 낭만적이고도 허황된 욕망, 젊음의 눈부신 야심을 떠올려보면, 이 책 『바질 이야기』는 일종의 프리퀄(prequel)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내면만을 향하던 시선을 밖으로 돌려 사회를 인식하고 그 속에서 점차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바질은, 삶과 사랑의 지고한 환멸 속에서도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을 갈구하고, 끊임없이 방황하고, 오만과 열등감을 오가는 소년
미성숙과 미완성에서만 엿볼 수 있는 그 찬란함에 대하여
“유머와 통찰력이 깃든 작은 걸작. (…)
피츠제럴드는 청소년기의 연애와 허세를 묘사하는 데
언제나 기적적으로 능숙하다.”
- 『뉴욕 타임스』
소설은 총 아홉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간 순서대로 전개된다.
1장 「그런 파티」와 2장 「스캔들 탐정단」에서는 어린이의 순진한 시선과 이성에 갓 눈을 뜬 소년의 정열이 묘한 조합을 이루며 바질의 내면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키스 게임에 빠진 바질이 부모님 몰래 술수를 부려 무리하게 파티를 열다 파국에 치닫기도 하고, 동네 소녀에게 반하고 만 그가 소녀 주위를 맴돌며 어린아이답지 않은 조숙한 매력을 발산하는 한 재간둥이 소년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결심하여 복수 작전을 벌이기도 한다. 바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련의 소동은 우스꽝스럽고 어딘가 처연하기까지 하다. 바질은 호기심과 질투로 뒤덮인 한때의 치기 이면에 복잡한 감정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3장 「박람회에서의 하룻밤」과 4장 「풋내기」는 조금씩 삶의 쓴맛을 알아가는 바질의 고뇌와 불안을 그린다. 무모한 모험과 야심을 공유했던 절친한 친구와 미묘한 갈등을 겪고, 큰 꿈을 안고 입학한 낯선 지역의 사립 기숙학교에서 예기치 못했던 위기와 마주한다. 어설픈 자기표현과 예민한 감수성은 바질을 곧잘 함정에 빠뜨린다. 그럼에도 그에게 힘이 되어주는 건 예일대 풋볼팀에서 활약한 뒤 불세출의 위인이 되겠다는 원대한 야심과 사랑, 그리고 예술이다.
5장 「걔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아」, 6장 「포로가 된 섀도」, 7장 「완벽한 인생」에서는 바질의 독특한 개성이 절정에 이른다. 청소년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깊은 수렁에 빠졌다가 겨우 헤어나왔던 바질은 친구, 연인, 꿈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고 믿는 사춘기 소년 특유의 낙관주의와 기복, 허풍, 그리고 필연적 불안을 체험한다. 그는 동부(뉴욕)로 대표되는 상류 세계로의 진출을 끈질기게 욕망하며, 스물다섯 살에 최연소 미국 대통령이 된다거나 괴도 신사로 활약하겠다는 다소 허황한 꿈에 기대 주위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그 열정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한다. 본인이 블랙코미디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8장 「전진하다」, 9장 「바질과 클레오파트라」에서 바질은 여전히 위태롭게 흔들리지만, 끝내 감상적인 사랑의 부질없는 꿈에서 깨어나 미래를 위한 노력을 다짐한다. 물론 바질은 아직 ‘미완성’이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고 해서 혹은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완성된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자신의 결핍을 직시하고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려는 의지야말로 미완성 인간의 가장 찬란한 재능이지 않겠는가? 치열한 몸싸움 끝에 겨우 한 발자국 전진하는 풋볼처럼 성장은 느리게 이루어지지만 마침내 터치다운, 필드를 질주해 얻어낸 삶의 또 다른 풍경은 우리 모두가 한때 바질처럼 방황했음을, 그리고 그 방황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