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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고 싶었지만

50년생 이순희의 육아 일기


  • ISBN-13
    979-11-91383-49-2 (03810)
  • 출판사 / 임프린트
    빨간소금 / 빨간소금
  • 정가
    1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10-24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이순희
  • 번역
    -
  • 메인주제어
    일기, 편지, 저널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일기, 편지, 저널 #장애 #인권 #뇌성마비 #뇌병변 #여성 #어머니 #7080 #부산 #페미니즘 #장애인권교육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5 * 218 mm, 284 Page

책소개

우리 시대 내 어머니의 이야기

차별과 혐오와 싸운 삶과 생활의 기록  

 

1950년생 이순희가 1970~1980년대에 아들 둘을 키우면서 쓴 육아 일기를 모았다. 일기는 1975년 10월 28일에 시작된다. 둘째 아들 형수를 낳은 날이다. 아이가 거꾸로 나왔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해 형수는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이순희는 그날 이후 매일 매일 용기를 냈다. 자신의 성별, 역할, 책임, 사랑, 행복, 정체성을 찾고자 애썼다. 그리고 변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아니라 시대 앞에서 절망했고, 온통 아들로 가득했던 세상을 자신으로 채워나갔다. 그 힘으로 다시 세상과 싸웠다. 고통을 숨기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다. 이 일기에 세상이 흔히 바라는 성공 스토리는 없다. 형수는 여전히 목발 없이 걷지 못하며, 이순희가  유명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자는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이 일기를 마무리한다.

 

일기는 겨우 스물다섯 살 여성이 부산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겪은 하루하루를 영화처럼 보여준다. 아이를 업고 연탄불에 밥을 지어야 했다. 아이의 목발 때문에 버스를 타는 것이 불가능한데 택시는 매번 잡히지 않았다. 형수를 특수학교 대신 일반 학교에 보냈고, 운동회와 소풍에도 꼭 참여했다. 뇌성마비에 관한 정보를 얻을 곳은 병원이나 물리치료실뿐이었다. 보조기를 여러 차례 바꿨지만, 국가의 보조를 받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늘 이유 없이 구박했고, 남편은 가족에게 무관심해 보였다. 이 모든 일들은 짝을 이뤄 매번 예고 없이 등장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고, 싸우는 게 무서웠다. 통곡하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특별해 보이지만, 그 시대 우리 엄마들의 일기장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목차

추천사

책을 펴내며

 

1. 불길한 예감(스물다섯~스물여섯 살)

2. 믿는 만큼 되는 아이(스물여섯~스물아홉 살)

3. 오늘의 최선(서른~서른한 살)

4. 엄마의 약속(서른둘~서른세 살)

5. 책임을 묻겠습니다(서른넷~서른다섯 살) 

6. 꽃이 유일한 친구(서른여섯~서른일곱 살)

7. 마음은 엄마한테 가 있다(서른일곱~서른여덟 살)

8. 씩씩하게 걷기를 바란다(마흔일곱~마흔여덟 살) 

본문인용

“뇌성마비아, 아주 경한 정도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별문제 아닌 듯 가볍게 말씀하셨다.

“성인이 될 때까지 꾸준히 운동을 해 주면 많이 좋아집니다. 언어 장애나 다른 장애는 없는 것 같지만, 지능은 지금 진찰이 되지 않으니 네다섯 살이 되면 그때 검사하세요.”

분명히 하늘이 캄캄해질 정도로 놀라야 하는데 그저 멍하니 형수만 바라보았다.(32~33쪽)

 

짧은 보조화를 신기는 데 거의 30분이 걸렸다. 3년 동안 겨우 적응해서 그만 신으면 좋으련만 또다시 시작이다. 더구나 긴 보조화라 벨트가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무릎에도 벨트를 묶고, 허벅지도 묶고, 발목도 묶고, 마치 물건을 묶는 느낌으로 다 묶어야 했다. 내 아이의 다리와 발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묶을 때의 어려움이야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아이는 움직이고 싶고 엄마는 고정하느라 진땀을 뺐다. 가슴이 터지고 손이 부르르 떨리는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91쪽) 

 

담임 선생님의 남다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사정과 부탁과 요구를 담아 말했다. 어쩌면 전적으로 ‘요구’가 될 수 있음에도 뻔뻔하게 부탁했다. 

“아이한테 몸이 불편한 동생이 있다고 반 아이들에게 상처 주는 분위기라면 엄마로서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담임 선생님께 그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 대신 공부 못하는 것쯤, 그 외의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이 얼마나 당돌한 요구인가. 이렇게 맹목적인 요구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내 성격이 대단하다.(165~166쪽)

 

어설프게 비뚤어진 방문을 열면서 “아이고, 어찌 오노?”라고 하셔야 할 엄마가 부엌에도 뒷간에도 없었다. 방문을 열어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헌 옷을 벗어 두고 가신 흔적이 있었다. 어디 나들이를 가신 듯했다.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마루에 털썩 앉아 감말랭이를 몇 개 주워 먹고 한숨을 쉬었다. 

한가득 감말랭이에서 엄마 냄새가 물씬 나 일순간 섭섭해졌다. 국거리를 씻어서 냉장고에 넣고, 밥 한술 찾아 먹고, 앞 밭에서 배추 한 포기 뽑아 가방에 넣고 시계를 보니 2시였다. 엄마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큼직하게 몇 자 써 두고 방문을 닫았다. 형수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각이었다. 어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겠는가.(213~214쪽) 

 

학원에서 두 번 정도 꽂아 보고 지도받고 집으로 와서는 열 번 정도 고쳐서 꽂아 본다. 그러다 보면 꽃의 키가 작아지고 꽃잎에 멍이 들었다. 그래도 싫지 않고 짜증이 안 났다. 보다 못한 형수가 외쳤다. 

“엄마, 이제 그만 꽂아라. 또 만지나? 그만해도 예쁜데.”

아이들의 이 말을 얼마나 기대했는가.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꽂고 또 꽂고 싶었다.(214쪽)

 

여기저기 아는 곳에 전화했다. 수화기를 놓는 순간에는 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 들었다. 자존심도 다 잃은 것 같았다. 

“돈 좀 빌려줘.”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누구도 대답이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순간순간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들어 눈 감고, 귀 막고 조용히 살고 싶었다. 담요 한 장을 깔고 덮어 새우잠에 들었다. 손까지 떨리는 서러움에다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통곡했다.(232쪽)

 

역장이 묻는다. 

“누구 기다리세요?”

“네, 내 아들 기다려요. 서울에서 학교 다니거든요. 목발 짚고 다니는 내 아들이요.”

왜 그리도 목청 높여 옆에 있는 사람 전부 다 듣게끔 말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저쪽에서 내 아들 형수가 절뚝절뚝 걸어왔다. 

“엄마.”

“아들아.”

동시에 맞닿아 안으면서, 옆 사람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280쪽)

서평

차별과 혐오와 싸운 삶과 생활의 기록

1950년에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난 이순희는 동네 어른들에게 여자는 초등학교만 나오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이에 이순희는 부산에 있는 삼촌 집으로 혼자 가서 “내, 내일부터 여서 학교 다닐란다”라고 선언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이 책은 이렇게 자기 삶에 당찼던 한 아이가 자라, 아들 둘을 키우면서 쓴 육아 일기를 모았다. 일기는 1975년 10월 28일부터 시작된다. 둘째 아들 형수를 낳은 날이다. 아이가 거꾸로 나왔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형수는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이순희는 그날 이후 매일 매일 용기를 냈다. 자신의 성별, 역할, 책임, 사랑, 행복, 정체성을 찾고자 애썼다. 통곡하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그리고 변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아니라 시대 앞에서 절망했다. 온통 아들로만 가득했던 세상을 자신으로 채웠다. 그 힘으로 다시 세상과 싸웠다. 고통을 숨기지 않았다. 침묵하지 않았다. 

이 일기에 세상이 흔히 바라는 성공 스토리는 없다. 형수는 여전히 목발 없이 걷지 못한다. 저자가 유명 인물이 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자는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이 일기를 마무리한다. 이들은 이제 동지가 됐다. 저자를 설명하는 단어는 장애가 있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다. 아들을 설명하는 단어는 장애를 극복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장애인권활동가이다. 이 세상 누구보다 서로의 서러움과 고통을 알고, 통곡할 수 있는 사이가 됐다. 목소리를 함께 내는 관계가 됐다.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해피엔딩은 없다.

이순희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꽃꽂이를 놓지 않았다. 인생 후반부에는 사회복지사 분야로 관심을 돌렸다. 현재는 주로 여성장애인 가정을 지원하는 홈헬퍼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형수는 대학에 가서 공부보다 장애인 인권 운동을 열심히 하더니, 졸업 후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를 만들었다. 

 

1970~80년을 살아간 여성의 이야기 

일기는 저자의 하루하루를 영화처럼 보여준다. 형수 첫 번째 생일을 맞던 날, 친정엄마가 떡을 해오자 시어머니는 고맙다는 인사 대신 “지만 아들 낳았나, 뭐 하러 친정까지 일렀나?”라고 타박했다. 형수를 등에 업고 불꽃이 올라오지 않는 아궁이 앞에서 죽을 젓느라 등을 구부렸더니, 연탄 연기에 숨이 막힌 듯이 아이가 울어댔다. 뇌성마비에 관한 정보를 얻을 곳은 병원이나 물리치료실뿐이었다. 보조기를 여러 차례 바꿨지만, 국가의 보조를 받지 못했다. 아이의 목발 때문에 버스를 타는 것이 불가능한데 택시는 매번 잡히지 않았다. 형수 통학을 위해 운전면허를 따려고 했더니, 친척들은 이순희를 두고 바람이 났다고 말했다. 이 모든 일들은 짝을 이뤄 매번 예고 없이 등장했다. 이때 저자는 주저앉지 않았다. 형수를 특수학교 대신 일반학교에 보냈다. 운동회와 소풍에도 꼭 참여했다. 결석도 지각도 허용하지 않았다. 두 아들이 같은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첫째 아이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아이한테 몸이 불편한 동생이 있다고 반 아이들에게 상처 주는 분위기라면 엄마로서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담임 선생님께 그 책임을 묻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특별해 보이지만 그 시대 내 어머니들의 일기장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차별, 독재에 저항하고 사회변혁을 이루는 것만이 투쟁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은 삶과 생활 속에서 맞닥뜨린 차별 앞에서 숨죽이지 않았다. 그것과 싸웠다. 본인을 위해, 그리고 나의 자식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게 하지 않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이 일기는 누구가는 기억해야 할 투쟁의 기록이다. 

 

뇌성마비 진단 이후 이야기  

이순희는 형수와 물리치료를 다녀오면 그날의 치료 과정을 복기해 동작 하나하나 기록했다. 물리치료는 가정에서 병행해야 효과가 있다고 의사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희의 일기는 형수의 치료일지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반듯이 누운 상태에서 뒤집어서 엎드리고 다시 반듯이 눕는 과정을 반복했다. 옆으로 몸통을 트는 자세, 팔을 괴고 엎드리는 자세, 팔을 세워 손을 펴고 방바닥을 짚어 얼굴을 찧지 않게 기어가는 자세를 했다. 그리고 쭉 다리를 뻗고 무릎을 움직이면서 배로 기다가 다음 단계에는 무릎으로 기어가야 한다.” 형수가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최선을 다해 물리치료에 매달렸지만, 안쪽 다리가 짧은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날을 이순희는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던 날보다 더 야속했다고 말했다. 악몽 같다고 일기에 적었다. 숙제가 하나 늘었다고 표현했다. 

재활치료나 보조기 착용에는 정답이 없다. 몸의 성장과 같은 발달의 변화나 진학과 같은 일상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해답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실패가 필연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이순희는 형수를 낳기 전까지 뇌성마비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스스로 정보를 찾고 해결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 검증이 덜 된 방법도 시도해야 했다.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국가는 없었다. 

다행인 것은 물리치료사가 있었다. 이순희와 치료사가 협력해 형수의 발달 과정을 함께 했다. 서로를 믿고 협력했기에 형수는 목발로 스스로 이동할 수 있게 됐고, 훈련으로 스스로 식사와 글쓰기가 가능하게 됐다. 

 

이순희와 연대했던 사람들 

이 일기의 시대 배경은 언뜻 이순희와 그 가족들에게 너무나 가혹해 보인다. 도시가스도 없고, 택시를 쉽게 부르는 시스템도 없다. 매 순간 치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힘이 있었다. 긴 외출을 했을 때 숙모님은 탄불을 피워뒀다. 형수의 담임 선생님은 방학 때 형수에게 손으로 쓴 긴 편지를 보내줬다. 스쿨버스 기사님은 형수가 가장 안전한 자리에 앉게 했다. 미술학원 원장님이 “형수도 무슨 일이든 혼자 할 수 있겠네.”라고 말해준 덕분에 형수는 그림에 재미를 들였다. 이순희의 친구, 이순희 남편의 친구, 형수의 친구, 형수 반의 학부모, 형수의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순희와 함께했다. 그것은 이순희가 절망하던 순간에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 됐다. 

 

그 시절 부산 이야기 

이 일기에는 1980년대 부산 감성과 지금은 사라진 언어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경주 도투락 월드로 가족 여행을 가고, 함박스테이크 맛이 궁금해 외식했다. 명절에는 비누와 설탕 선물을 주고받았다. 오락실이 생겨 아이들이 들떴다. 독서실이 생겼는데 그곳이 공부하기에 어떤 곳인지 어른들은 몰랐다. 일반 목욕탕 요금이 950원인데, 사우나탕이 요금은 2,500원인 걸 알고 놀랐다. 낯선 지하철을 탈 때 남편이 잘 안내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 대신 동무나 짝지라는 말을 흔히 썼다. 

그리고 이 일기는 장애가 있는 자녀가 있는 가족이 당시의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준다. 이순희의 가족은 급격히 들어오는 새로운 문화를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모두 즐겼다. 여행을 떠날 때는 형수가 참여하기 가장 적합한 곳으로 정했고, 백화점 바닥이 미끄러워도 목발을 고집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자소개

저자 : 이순희
1950년에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골에 계속 있으면 중학교도 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 있는 삼촌 집으로 혼자 가서 “내, 내일부터 여서 학교 다닐란다”라고 선언했다.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에 올라가 전자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오빠 친구와 결혼했다. 스물세 살에 첫째를 낳았다. 둘째 아들 형수는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꽃꽂이를 놓지 않았다. 인생 후반부에는 사회복지사 분야로 관심을 돌렸다. 현재는 주로 여성 장애인 가정을 지원하는 홈헬퍼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형수는 대학에 가서 공부보다 장애인 인권 운동을 열심히 하더니, 졸업 후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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