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저자의 『한국어 문법론의 개념어 연구』(2012)를 전신으로 하여 그 내용을 대폭 수정하고 보완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 책을 두고 『한국어 문법론의 개념어 연구』의 개정판이 아닌 새로운 저서로 상재하는 데에 모자람이 있지는 않은지 재삼재사 숙고하였다. 형태론을 전공하는 오규환 교수, 통사론을 전공하는 문병열 교수가 새 집필자로 참여하였고 보통의 단행본 분량에 해당하는 300쪽이 넘게 추가되었을 뿐 아니라 이전의 책 내용에서도 상당한 수정이 이루어졌으므로, 새로운 책으로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 책은 한국어 문법론에서 난맥으로 얽혀 있거나 생소한 주요 개념들에 대한 선행 연구를 고찰하여 현재 연구자들의 시간을 절약해 주려는 의도로 기획한 것이다. 저자는 한국어학 연구를 시작하던 1990년대 초에 존 라이언스(Lyons, J.)의 Introduction to Theoretical Linguistics를 읽고서 앞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역할 전범을 라이언스로 결정하였다. 비록 라이언스의 저서에도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방대하고 착종된 언어학의 수많은 개념어를 감탄스러울 정도로 요령 있고 간결하게 기술한 그의 책에 큰 감명을 받았다. 책 제목 앞에 흔히 붙이는 관사 ‘An’도 붙이지 않은 라이언스의 자신감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한국어 문법론의 개념어 연구』와 이 책은 그러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한 오랜 마음속 테마를 구현한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은 개념어에 대한 우리의 공부와 생각을 기술한 데에 국한된다. 현대의 한국어 문법론은 매우 방대해져서 수많은 개념어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 연구자들마다 어떤 개념어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는지 살피는 일, 만약 다르게 쓰고 있다면 어떻게 다른지를 고찰하는 일만으로도 엄청난 작업이 되는데, 그런 엄청난 작업조차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이 책의 제목을 『한국어 문법론의 점과 선』으로 정한 것도 대략 지금으로부터 60년 동안의 한국어 문법론 논저들을 대상으로 하여 수많은 개념어 및 그 개념어를 둘러싼 연구사를 고찰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념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점이라면 그를 둘러싼 연구사적 논쟁에 대한 이해는 선쯤 될 것이다. 면과 입체가 되는 것은 이 책 한 권으로는 언감생심일지 몰라도 우리가 찍고 그은 점과 선이 언젠가는 면과 입체를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책에서 언급하지 못한 한국어 문법론의 논저들 중 가치 있는 보석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 보석들의 주인께 죄송스러운 마음을 표한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룬 논저라도 우리의 역량이 모자라 오독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다시 크게 수정‧보완된 책을 내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독자들께서 수정‧보완할 내용을 제보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상범 선생님은 역작 『형태론』의 서문에서 눈이 계속 펑펑 오는데 넓은 연병장의 눈을 쓸어야 했던 군 생활 때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 심정을 느끼곤 하였는데, 그것은 이 주제로 책을 쓰려고 했을 때부터 각오해야 했을 것이기도 하다. 문법론의 영역은 광대한데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현실적 여건도 여의치 않았으며, 읽어야 하는 논저가 계속 불어나 시간이 갈수록 과제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데에서 우리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우리는 한국어 문법론의 과거 업적들, 곧 대략 60년 이상 지난 업적들과 북한의 문법론 업적들에 대해 고영근 선생님과 같은 대학자들의 한국어 연구사 관련 논저 이상의 내용을 담아낼 자신이 ‘전혀’ 없었다. 눈앞에 놓인 태산에 질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만 갈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완전한’ 한국어 문법론의 개념어 연구를 구상하였으나 최종 결과물인 이 책은 그러한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약점이 이 책에서 큰 흠결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대개 인간의 인지는 역사를 흡수하는 법이어서 어떤 지식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사장(死藏)된 것이 아니라면, 후대의 지식은 이전의 지식을 고려하여 포함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가령 ‘형태소’와 관련한 현대의 논의를 충분히 고찰하면 굳이 주시경 선생의 ‘늣씨’를 따로 살펴볼 필요가 없다. 이 책의 근본적 목표는 한국어 문법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주요 개념어들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다. 연구사 검토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한국어 형태론, 품사론, 통사론, 문법 이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수많은 개념어들을 심층적으로 고찰하려는 생각은 어찌 보면 무모한 것이다. 이는 항목별 논의의 깊이가 천차만별인 데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선행 연구의 분량과 깊이 자체가 불균형하게 축적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해당 주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통찰의 정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의 내용은 해당 문법 개념어에 대한 본격적이고 완전한 연구사 기술도 하지 못했고 또 쟁점이 되거나 여러 관점이 존재하는 모든 현대 한국어 문법론의 개념어를 낱낱이 소개하지도 못하였으며 충분히 익은 우리의 의견을 소상히 밝히지도 못한 어정쩡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개념어 사전으로 보아도 사전이 갖추어야 할 요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다만, 몇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우리에게 그나마 위안거리가 있다면, 이 책에 그 몇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추적한 궤적은 충분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어 문법론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개념들 전반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개략적으로 훑어, 적어도 한국어 문법론의 본격적 연구 초입에 있는 이들에게 길잡이 정도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고, 손도 대기 어려울 정도로 전문화된 한국어 문법론 공부의 가닥을 잡고 싶은 국어교육 및 한국어교육 전공자들이나 한국어 문법론 이외의 분야를 전공하는 한국어학자들에게 충분히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것임을 확신한다. 더 나아가 항목에 따라서는 한국어 문법론의 전문 연구자에게도 유용한 정보 및 통찰을 제공하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라 자부한다.
대학 입학 시 까막눈에 가깝던 저자들에게 학은을 베풀어 주신 분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태산북두와 같은 은사님들은 물론이고, 훌륭한 연구 업적을 내셨고 여전히 내고 계신 선배, 동학, 후배 선생님들께 배운 지식과 통찰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뛰어난 논저와 사적 교류를 통해 우리를 발전시켜 주신 타 학교 많은 선생님들의 은혜도 빼놓을 수 없다. 끝으로 상업성이 없는 이 책을 흔쾌히 출판해 주신 한국문화사의 김진수 사장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24년 10월 9일 한글날에
저자들을 대표하여
이선웅 삼가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