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고시원 관련 유튜브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2시간, 주 4시간만 일하고 고시원으로 1천만 원 벌기’라는 제목의 썸네일이었다.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고시원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다달이 월세가 들어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버는 돈도 많았다. 물론 처음엔 말도 안 되는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에이, 설마. 저렇게 쉽게 돈 많이 버는 일을 왜 다른 사람에게 굳이 알려주겠어? 경쟁 상대만 늘어날 뿐이지.’
하지만 영상을 끄고 난 뒤에도 계속 고시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고시원 창업에 관련된 글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고시원과 스터디 카페 등을 통해 경제적 자유를 이루었다는 글은 이미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었다. 내가 아는 고시원은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타인은 지옥이다〉가 전부였는데, 그 무시무시한 고시원으로 큰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밑져야 본전인데 알아나 보자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그동안 직장에서 살아남겠다고 아등바등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지나갔다. 억울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고시원 사업을 한창 알아볼 때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아이가 아픈 상황이라면 회사를 그만둘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악착같이 다녀서 병원비를 마련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회사는 결코 내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 지금이야 한창 효율적으로 일할 나이이다 보니 회사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대체할 고급 인력은 대학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나는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간과 노동력을 갖다 바치지 않아도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주는 시스템을 갖고 싶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은 바로 그 시스템에서 나올 거라는 생각은 사업을 준비하면서 점점 확고해졌다. 지금껏 무한한 시간을 가진 사람처럼 살았다면, 이제는 오늘이 마지막인 사람처럼 살 차례였다.
- 〈고시원 사업에 끌릴 수밖에 없는 여섯 가지 이유〉 중에서
우리는 늘 잘난 척하며 산다. 선입견과 편견에 빠진 줄도 모르고 색안경 낀 눈으로 누군가를 평가한다. 고시원에 살면 가난할 거라고, 지방대를 나왔으니 공부 열심히 안 했을 거라고, 반대로 강남에 살면 부자이고 8학군 출신이니 공부도 열심히 했을 거라고. 그 색안경을 낀 사람이 바로 나였다. 부끄러웠다.
나아가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은 고시원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생각보다 따갑고 쓰라린 타인의 시선을 견뎌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청년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니, 나는 한순간이라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본 경험이 있던가. 오히려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등바 등하지 않았나.
- 〈몽클레르와 롤렉스를 걸친 허세남의 정체〉 중에서
일반적인 주거 시설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재미있는 규칙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밥 당번 시스템이다. 오래전부터 대부분의 고시원에서는 무료로 쌀과 김치, 라면 등의 부식을 제공해왔다. 시리얼과 우유까지 주는 고시원도 있다(물론 고시원에 따라서는 야박하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매번 고시원 밥은 누가 할까? 우리가 현재 운영하는 고시원 임장을 처음 왔을 때, 공용 주방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밥을 드신 분은 반드시 밥을 해주세요!’
내가 마지막으로 밥솥에 남은 밥을 먹었다면 다음 사람을 위해 직접 밥을 안치는 게 고시원 주방의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원장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만들어진 셀프 시스템이 아닌가 싶다. 나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번거로운 일이다.
그 번거로움 때문에 간혹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밥을 안치기 싫은 사람이 일부러 한 숟가락 정도 밥을 남겨두는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사람은 밥을 먹지도 못하고 쌀부터 씻어야 한다. 배고픈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분통 터질 일이다. 배고플 땐 사람이 더 예민해지지 않는가.
- 〈우리 고시원에 우렁각시가 살고 있습니다〉 중에서
하루하루 살기 위해 앞만 보고 내달리다 고꾸라지기 직전이었던 그 순간, 타인이 주는 우연한 관심과 배려는 의외로 대단한 힘이 되었다. 이처럼 때로는 낯선 이의 위로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평소 우리는 서로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에게 온기를 선물하는 귀인이 될 수도 있다. 일상에서 아주 조금만 더 배려심을 발휘한다면 말이다.
나는 고시원장이고, 그녀는 정당하게 돈을 내고 머무는 입실자다. 우리에겐 서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도, 그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하지만 내 진심을 제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오지랖을 부려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다.
“힘내요. 내 생각엔 지금 당신은 누구보다 잘하고 있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다 잘될 거예요.”
그녀에게, 그리고 어쩌면 과거의 나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 〈저희 고시원 사실 별로예요〉 중에서
불합격한 학생들에겐 미안하지만, 고시원에서 최종적으로 합격한 학생이 나오면 신기하게도 직접 뒷바라지한 것처럼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고시생이 유독 많은 노량진에서 고시원이나 하숙집 바깥에 ‘무조건 합격하는 명당’, ‘최다 합격자 배출’ 같은 현수막을 내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큰 탈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내어주고 적당한 가격을 받을 뿐이지만, 누군가의 꿈이 한 뼘 커지는 여정에 소소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묘한 보람 같은 걸 준달까. 인간은 직업의 귀천을 떠나 타인에게 유용함을 제공할 때 가치를 느끼는 게 분명하다.
- 〈다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중에서
부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앞으로 고시원을 ‘타인의 지옥’이라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시원 방은 고작 2평 남짓 방이지만 누군가에겐 삶의 뿌리가 내린 공간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지친 몸을 뉘고 잃어버린 온기를 되찾는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다. 단지 어떤 어려움에 의해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다.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른 뒤 각자의 꿈과 희망을 좇아 나아갈 것이다.
나는 종종 고시원에서 한 발짝 물러나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면 세상은 조금 더 넓은 고시원이 된다. 가까운 사람끼리 날을 세우면 지옥이 될 수 있지만,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면 이웃이 되는 곳. 살면서 때때로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받지만, 결국 타인을 통해 치유 하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곳. 고시원이 지옥이라면 세상도 지옥이다. 서로 배려하는 고시원 사람들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빛을 비추는 햇살이 되길 바란다.
-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