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잃어버린 30년”이나 “디플레이션에 빠진 일본 경제”와 같은 말을 많이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흔히 “일본화”라고 한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중앙은행은 디플레이션의 위험에 대해 적극적인 금융 완화를 실시해야 한다는 교훈이 함께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식은 해외의 저명한 경제학자나 국제기구 사이에 정설처럼 회자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나는 이러한 일본 경제와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해외 각국의 통화정책, 나아가 세계 경제에도 큰 악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물가가 안정되어 있어도 버블이 발생해 경제의 큰 변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일본의 경험을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배웠더라 면 해당 시기에 유럽과 미국의 통화정책은 다르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022년 이후 글로벌 인플레이션만 보더라도 디플레이션에 대한 과도한 우려가 지나치게 적극적인 재정정책, 통화정책의 집행을 가져왔고, 일본의 경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여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_〈본문 12쪽〉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한 일본 경제는 성장력을 높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저출산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대책이 효과적이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두고 끝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점은 세계적으로 볼 때 일 본, 한국, 중국, 대만 등 유교 문화권 국가들이 출산율 저하가 특히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의 저출산 대책, 나아가 외국인 노동자 수용 대책과 그 영향에 대해 일본에서 참고할 수 있는 사례가 특히 많을 것이다. _〈본문 13쪽〉
1985년 9월부터 1988년 11월까지 통화정책 수립을 담당하는 총무국(현재 기획국)의 중간 관리자로 근무했다. 그 후 1990년 5월까지 조사통계국에서 통화정책 결정을 뒷받침하는 경제 전망 업무를 담당했으니 버블 기간 대부분을 통화정책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한 셈이다. 버블 경제만큼 거시경제와 통화정책 운용에 대한 나의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험은 없을 것이다. _〈본문 52쪽〉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1980년대 후반에는 일본 전역에 걸쳐 낙관적인 기대감이 팽배했다. 이는 일정 부분 일본 경제의 거시적 성과가 국제적 기준에서 매우 양호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일본 경제는 연평균 3.8퍼센트 성장한 반면 인플레이션은 1.0퍼센트에 그쳤다. _〈본문 57쪽〉
정확한 날짜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버블이 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1989년 마지막 거래일 닛케이 지수가 3만 8915포인트로 정점을 찍은 후 급격하게 하락했다. 6개월 후 3만 2817포인트, 다시 6개월 후 2만 3848포인트를 기록했고, 1992년 10월 18일에는 1만 4309포인트를 기록해 최고점 대비 60퍼센트 이상 하락했다. _〈본문 80쪽〉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는 물가 안정을 추구하는 통화정책을 통해 거시경제 안정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주류적인 사고였다. 이 견해는 1980년대 후반 정책 당국자들과 학계에서 서서히 등장해 1990년대에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_〈본문 182쪽〉
일본은행 총재가 되면서 국회 출석 빈도 또한 늘어났다. 이사 임기 중에도 국회 질의에 답변한 경험이 있었지만 총재가 된 후에는 더 많은 기회가 있었다. 총 117일, 연평균 약 24회 정도 국회에 소환되었다. 경제 상황에 따라 빈도는 크게 달랐는데 2012년 2월에는 한 달 동안 9회까지 출석한 적도 있다. 가장 빈번한 회의는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의 재정위원회와 양원의 예산위원회였다. _〈본문 205쪽〉
2009년 봄, 전 세계 금융 시장의 흐름이 바뀌면서 금융 시스템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는 큰 안도감을 주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길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한동안 지속될 “거짓 여명”의 시작이었다. 2009년 9월 일본 민주당이 집권 여당이 되었고, 11월에는 디플레이션을 공식 선언했다. 디플레이션을 둘러싼 논쟁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2013년 나의 일본은행 총재 임기가 끝날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_〈본문 250쪽〉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완만하게나마 물가 하락이 지속된 것은 사실이다. 왜 장기간에 걸쳐 물가가 계속 하락했을까? 많은 정치인과 학자는 단순히 통화 완화가 불충분했다고 주장한다. 18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일본을 제외한 많은 선진국에서도 중앙은행이 통화 여건을 공격적으로 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인플레이션 또는 심지어 물가 하락이 관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속적인 물가 하락 기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앞서 언급했듯이 명목 임금의 유연성이다.26 일본과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살펴보면 제품과 관련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주로 노동 집약적 서비스 가격에서 차이가 관찰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정규직 근로자들이 고용주가 최대한 일자리를 유지하는 대가로 제한된 임금 인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경제가 침체되는 동안에도 실업률 증가가 제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다른 선진국에서 관찰된 실업률의 급격한 증가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임금 하락에 따른 완만한 물가 하락에 직면해야 했다. _〈본문 273쪽〉
일본은행의 입장 공개는 일본 경제가 직면한 중장기 과제를 가능한 한 철저하게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급속한 고령화와 출산율 하락이었다.3 일본 인구는 2008년 1억 28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계속 감소해 2019년에는 1억 2600만 명으로 2008년 이후 연평균 0.1퍼센트씩 감소해왔다. 동시에 15세에서 64세 사이의 생산가능인구는 14년 전인 1995년 873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약 12퍼센트 감소해 2012년에는 8020만 명, 2019년에는 7520만 명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감소세는 처음에는 완만했지만 전후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가 2012년경 65세의 은퇴 연령에 도달하면서 가속화되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생산가능인구는 연평균 약 94만 9000명이 감소했으며, 이는 연간 1.2퍼센트의 감소율에 해당한다. _〈본문 293쪽〉
유럽 부채위기의 심화로 일본에서는 일본이 이 위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에 대해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다. 재정 건전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위기가 그리스의 재정위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일본은 그리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재정 개혁을 촉구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번 위기가 재정 적자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통합 없이 통화 동맹에 나설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한 경제에 자체 통화와 중앙은행이 있다면 금리 인하나 통화 가치 하락을 통해 재정위기에서 회복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_〈본문 323쪽〉
일본은행은 대규모 자연재해 발생 시 신속하고 적절한 대응의 중요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1995년 일본을 강타한 고베 대지진 이후 업무 연속성을 위한 계획과 필요한 인프라를 갖추는 데 상당한 자원을 투자했다. 이러한 준비 덕분에 일본은행은 많은 어려움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도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은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멜트다운과 그 여파였다. _〈본문 365쪽〉
선진국의 많은 경제정책 당국자들은 “통화 전쟁”이라는 용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지만 이미 경제 전문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내가 참석한 국제회의에서도 현 상황을 “통화 전쟁”으로 보는 인식에 대한 비판을 많이 들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과 자본의 흐름은 당사국들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가 함께 발전하는 데도 기여한다. 이런 무역과 자본의 흐름으로 인한 환율 변동을 전쟁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해 보였다. 만테가의 발언은 브라질의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다른 나라로 돌려 회피하려는 시도로도 보였다. _〈본문 405쪽〉
거시건전성 관점에서 일본 금융 시스템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금융기관의 낮은 수익성이다. 노동력 감소로 인해 잠재 성장률이 점차 낮아지면서 모든 금융기관은 국내 대출 기회가 줄어들어 수익 창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인구 감소가 가장 두드러진 도쿄 외곽의 지방 은행과 신용협동조합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아 대출 기회가 급격히 감소했다. _〈본문 485쪽〉
2012년 12월 16일 총선에서 야당인 자민당은 294석을 차지한 반면 여당인 민주당은 57석에 그치며 역사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이번 투표가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한 명시적인 국민투표는 아니었지만, 아베 신조 총리가 통화정책에 대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해왔고 그의 정당이 압승을 거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_〈본문 513쪽〉
나는 통화정책에 대한 아베 총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총선에서 일본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새 정부에서 새로이 중앙은행 총재를 임명해 새 부총재와 함께 일본은행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3월 19일 자로 총재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한 나는 2월 5일에 총리를 찾아가 내 결정을 직접 알렸으며, 그날 저녁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했다. 기자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나의 사임은 신임 총재와 부총재가 동시에 취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3월 19일까지 총재로서 내 책임을 다할 것임을 강조했다. 기자들은 내가 항의 차원에서 사임한 것인지, 아니면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것인지 물었지만 나는 2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_〈본문 533쪽〉
일본 경제를 묘사하는 데 “잃어버린 수십 년”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내 견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처음에는 일본 경제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실 대출 문제에 대해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데 공적 자금 투입이 지연되는 상황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 표현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잃어버린 수십 년”이라는 표현이 점차 디플레이션이 근본 원인이며 적극적인 통화정책 완화가 해결책이라는 주장을 대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진단과 정책 처방에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의 초기 경험과 다른 선진국 경제의 위기 이후 상황 간에 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관찰하면서 내 견해는 더욱 굳어졌다. _〈본문 554쪽〉
“중앙은행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플레이션이 너무 낮아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라는 교훈이 일본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디플레이션은 일본 경제 저성장의 원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일본 경제의 과거 성과가 아니라 미래의 지속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더 적은 노동자가 더 많은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는 현재의 1인당 소득 증가세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_〈본문 560쪽〉
사회 계약과 경제 구조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전통적인 경제 활동의 척도인 GDP 이외에 사회 후생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행 총재 재임 시절 내 사무실을 방문한 다수의 외국 정책 당국자들과 경제학자들은 디플레이션과 같은 전형적인 주제에 대해 논의한 후 종종 솔직한 소감을 털어놓았다. “도쿄 거리를 보면 일본이 ‘잃어버린 수십 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틀린 걸까요?” 그들의 관찰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지만 핵심을 짚은 것이었다. _〈본문 570쪽〉
일본은행 총재가 된 후에는 총리, 재무장관과 직접 대화하고 국회 위원회에서 질의에 답변할 기회가 많았다. 이를 통해 일본은행과 정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일본은행과 정부의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고 총리, 재무장관, 총재의 성격에 따라 자연스럽게 달라지기 때문에 총재 시절의 경험이 전임 총재들과 어느 정도 같았는지는 모르겠다. 정치 환경만 놓고 보면 재임 기간 동안 여당이 2번 바뀌었고, 5년 동안 총리가 6명, 재무장관이 10명이나 바뀌었다. 장관 임기가 짧은 것이 특징인 전후 일본의 관례에 비추어 보더라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_〈본문 624쪽〉
중앙은행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 힘든 신기한 존재다. 이 불가사의한 존재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 국내외 많은 사람이 중앙은행에 관한 다수의 책을 썼다. 저자는 중앙은행 관계자와 경제학자뿐 아니라 언론인, 역사학자, 정치학자 등 다양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더 많은 책이 출간되고 있다. 내가 일본은행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은행을 논하는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한 지 최소 4년, 일본은행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다. 원고 집필을 마친 현재, 일본은행이라는 조직을 진정한 의미에서 졸업한 기분이다. _〈본문 670쪽〉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점, 이전에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중앙은행에 동의할 수 없는 정책을 강제할 때 중앙은행은 독립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저자가 다른 매체에서 말한 것처럼 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지 않아야겠지만 그렇다고 중앙은행이 ‘나라 안의 또 다른 나라’가 아니라면 두 주장의 접점은 어디일까? _〈본문 681쪽〉
《파이낸셜타임스》의 마틴 울프는 2001년 〈벼랑 끝에서 선 일본〉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과감한 통화 팽창을 주장했으나 2017년 〈일본에 대한 통념은 틀렸다〉라는 칼럼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정책 처방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마크 거틀러도 2017년 일본은행 연례 콘퍼런스에서 “더 이상 일본의 침체를 잘못된 통화정책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중요한 문제는 일본의 지속적인 저물가와 저성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아베노믹스의 설계자라 불렸던 예일대 하마다 고이치도 2016년 한 인터뷰에서 “과거에 디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이라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_〈본문 6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