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누구인가? 한국인은 불운한 운명의 자식이자 혁명의 후손이다. 한국인(대한민국 국민, 남한인)과 북한인, 재일교포, 조선족(재중동포), 카레이스키(고려인), 재미교포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를 한국인이라 부르기로 해보자. 누가 이 한국인들을 만들었는가? 첫 번째로 지목할 우리 한국인의 공통 조상은 신화적 영역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다. 역사적인, 실체를 가진 조상은 두 분이 더 계신다. 먼저 고려 임금 현종이다. 현종은 거란과의 전면전쟁을 통해 한반도 주민을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틀 안에 그러모았다. 다음은 유학자이자 신국가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한국인의 구체적인 특질을 창조해냈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나선처럼 교차를 거듭하며 이어진 줄기다. 수많은 이들과 사건, 투쟁의 성취와 좌절이 거듭된 결과다. 그러므로 단 세 명을 중심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말하려는 시도는 심한 압축이며 비약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한국사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대한 이해’다.
_12-13쪽, 들어가는 글: 한국인이라는 미스터리 중
단군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실패했다. 첫째는 자연환경이다.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은 눈으로 보기엔 아름답지만 몸으로 견디기엔 매우 고통스럽다. 한국보다 더운 곳도 있고, 추운 곳도 있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 안에 한국처럼 극단적인 사계절의 차이가 강요되는 곳은 없다. 한국인은 차이에 고통 받지 절대적인 온도에 고통 받는 게 아니다. 여름에 덥기로는 대만이나 그 남쪽의 아시아가 더 덥다. 겨울에 춥기로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일부 지역이 더 춥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우리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1년 시간 안에 더위와 추위가 함께 있지만, 그 차이는 한반도에 비해 훨씬 온화하다. 한국은 한반도의 거의 대부분이 비슷한 조건에 노출돼 있다. 여름엔 정말 덥고 겨울엔 정말 춥다. 한국인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기후의 극단적인 변화에 매년, 반드시 정기적으로 노출돼왔다. 한반도는 생산력도 절망적이다. 70% 이상이 거칠고 변화무쌍한 산악지형이다. 그렇다고 평지가 풍요로운 것도 아니다. 좁디좁은 평지는 산악지형보다 조금 더 풍요로울 뿐이다. 한반도의 겨울은 추운 사막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척박하다.
_28-29쪽, 1장 창세기 중
한국인이 한반도에 사로잡혔다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한국인은 단군이 고른 땅 내부에서만 형성되지 않았다. 외부의 요인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한국인의 원형을 설명할 수 없다. 이제 단군의 결정적 실패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단군은 무엇을 또 실패했는가. 위치선정이다. 단군은 이웃을 잘못 두었다. 한국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오래된 친구이며 가공할 적, 바로 중국이다.
_68쪽, 2장 평화는 생존의 지옥이다 중
한국은 어째서 중국에 흡수되지 않았는가?
역사학자라면 모두가 의아해하는 결과가 도출된 과정이야말로 한국인의 비밀을 푸는 몇 가지 열쇠 중 하나다. 한국은 왜 오래전에 망하지 않았는가? 다시 말해 한국은 왜 존재하는가? 어째서 중국의 팽창으로부터 살아남았는가?
한국인은 자신들이 전쟁민족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최근의 전적이 별로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근이란 임진왜란부터를 말한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일본에 멸망 직전까지 몰렸고, 병자호란에선 임금이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 안에서 침공군에게 항복하는 수모를 겪었다. 구한말 러일전쟁의 전리품이 되어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일은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오랫동안 한국인의 자존심을 긁을 것이다. (…) 현재의 한국인에게 한민족이 전쟁을 못 한다는 착각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민족 중 전쟁민족이 아닌 집단은 찾아보기 힘들다. 패배자들은 이미 사라졌다. 혈통과 언어를 잃어 정체성을 말살당한 것이다. 민족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복잡한 논의는 이 책에서 하지 않겠지만 혈통과 언어 중 적어도 하나를 잃으면 민족은 사라진다. 여기서 ‘민족’을 ‘종족’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반도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 섬과는 처지가 다르다. 일본과 비교하면 한반도의 사정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_70-71쪽, 3장 전쟁은 산성이다 중
산성 위에서 적에게 투사(投射, 던지고 쏨)하던 화살과 돌, 그리고 현재 남북한의 미사일은 한반도 안에서 하나의 유전적 동일성을 가진다. 한 손에 들어오는 조그만 애완견이 회색늑대의 아종(亞種)인 것과 같다. 아종은 눈으로 보기에만 다를 뿐 사실 유전적으로는 같은 종의 생물이다. 한반도 주민은 화력 없이 보낸 백년의 고독에 원한이 맺혀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은 세계의 주목을 받기 위해 공포와 파괴를 떠벌리는 북한을 잘 이용해왔다. 미치광이 행세하는 북한의 뒤에서 최대한 쓸데없는 소리를 내지 않고 고급 무기 체계를 개발해왔다. 외국의 눈에 21세기 들어 고급 무기를 갑자기 쏟아내기 시작한 한국은 기이한 나라다. 센 척하는 북한 덕분에 약한 척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더는 엄살을 부릴 수 없게 됐다. 현재 한국은 태도를 바꿔 해외에 무기를 팔아치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_122쪽, 4장 전쟁은 사격이다 중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념적 동의 위에서 굴러가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국가란 어디까지나 현실적 필요를 위해 타협된 결과다. 한국은 협업을 통해 굴러가는데, 그 협동이란 게 싫어하는 인간들끼리 이루어지기에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그러므로 조국은 신성하지 않다. 한국인에게 조국이란 쓸데없는 잔소리가 많은 귀찮은 노인이다. ‘저 노망 난 노인네 언제 죽나’ 하고 읊조리는데, 이건 진심이다. 그런데 더 깊은 진심에서는 쓰러지면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어갈 준비도 되어 있다. 한국인에게 국가는 도구지만 한국은 운명이다. 운명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다만 감수해야 하는 무언가다. 조국은 신성하지 않은 숙명이다. 산성 방어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전쟁만이 숙명은 아니기에 한국인은 재난 상황에서도 산성 방어를 수행한다.
_125-126쪽, 5장 전쟁과 평화 중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서 민족국가 두 개를 날려버렸다’는 논리로 신라를 매국노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안하게도 당시에는 민족국가 의식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아쉬워하는 건 선택이지만 비난은 좀 생각해볼 일이다. 마찬가지로 ‘고구려는 사라진 추억일 뿐이다’라며 일부러 고개를 돌리는 습관도 어리석다. 진실은 복합적이지만, 아주 조금만 복합적이다. 신라가 통일왕조를 유지하면서 한국인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한국인이 신라 이상으로 고구려의 유산 위에 서있다는 사실도 함께 인정받아야 한다. 한 링 위에서 만난 두 권투선수는 한쪽이 이기거나 져야 한다. 그런데 한 건설현장에서 만난 도장공과 용접공은 각자 자기 일하고 헤어지면 된다. 역사는 건축물인데도 링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신라의 역할을 인정하면 고구려의 영향을 부정해야 한다거나, 고구려 중심 사관을 선택하면 자동적으로 신라를 비난해야만 하는 공식 같은 건 없다.
_148쪽, 6장 고려는 고구려다 중
고구려는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중국의 힘을 무시했다. 중국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고구려를 응징하려고 했다. 결과는 양측에 모두 불행했다. 물론 멸망한 고구려 쪽이 훨씬 손해다. 하지만 중국은 손해를 안 봤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여파로 멸망했다. 당나라는 두 번의 실패로 멸망 직전에까지 몰렸다. 만약 당나라까지 멸망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수백 년의 후퇴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무엇을 얻었는가. (…) 중국은 결과적으로 얻은 게 없었다. 고구려 유민은 곧바로 발해를 세워 고구려의 자리를 대체했다. 발해가 멸망하고 10년 후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고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멸망한 적이 없는 것이다. 불필요한 고통은 한반도와 중원 양쪽에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중국에 있어 한반도에 싸움을 거는 행위는 막대한 비용에 비해 소득이 너무 없었다. 한반도는 한반도대로 끝까지 가면 인구와 생산력의 한계를 만나 왕조가 멸망하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나치게 값비싼 실험을 한 후 한반도와 중국은 이후 암묵적 합의에 이르렀다고 확신한다. 중국은 한반도가 고개를 숙여주기만 하면 건드리지 않기로 결론을 굳히고 행동했다. 한반도 왕조는 중국이 책봉하는 제후국의 지위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체면을 세워주는 대신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는 거부하기로 했다. 이러한 타협은 그 자체로 평화다. 그러므로 고려가 일어선 폐허에 아무런 값어치가 없지는 않았다. 고구려는 죽지 않고 부활했을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_152-153쪽, 6장 고려는 고구려다 중
양규의 대단함은 단순히 나라를 구했다거나, 누구보다 육중한 활을 다뤘다는 사실, 그가 쏘는 화살이 사거리와 위력에 있어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으리라는 점 따위에 있지 않다. 양규는 국가 정신이 무엇인지를 제시했다. 양규와 그의 군사들은 고려의 평민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전원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국가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 충성했다. 하나는 왕조, 하나는 백성이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현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11세기의 중세 전사에게는 비범한 정신세계인 것이다. 고려왕조 역사에 영웅은 많지만, 그처럼 도덕적으로 완성된 영웅은 없다. 그러하기에 현종은 양규가 죽음으로 던진 질문에 정답을 제출해야 하는 숙명에 내던져졌다. “국가의 자격조건은 무엇인가?”
_177-178쪽, 7장 추남과 사생아 중
민족국가는 이야기의 비계 안에서 굳어진 건축물이다. 한국인의 유전적 동일성이 아무리 강한들, 그래 봐야 다른 민족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단일민족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은 상상으로 세워진 모래성이지만, 모래성에서 출발한 민족국가는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 민족은 스스로는 실체가 없으면서 국가와 국민이라는 현실을 만든다. 비계는 존재했던 틀이며, 민족은 실존하는 허구다.
공동의 적에 맞서 살아남은 이들은 공동체가 된다.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발해계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그들 서로보다 훨씬 이질적인 적에 맞선 이야기는 생명력을 가진다. 한반도 주민들은 함께 고통받았고 승리의 기억 역시 함께했다. 귀주에 모여든 20만 명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제는 하나가 된 승리와 극복의 서사를 이야기했으리라. 양규의 영웅적 죽음과 하공진의 절개는 전설이 되었으리라. 같은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집단이 되었으리라. 현종이 겪은 끔찍한 굴욕과 공포는 모든 고려인들이 겪은 고난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말을 탄 귀족들이 평민 보병을 구원하기 위해 돌진한 결과 세계가 구원받았을 때, 그 세계는 ‘우리’가 된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해졌다. 한민족이 탄생했다.
_208쪽, 8장 싸움터에 솟아오른 비명 중
조선은 임금이 나라를 사유화한 게 아니라, 사대부가 임금을 국유화한 나라다. 그러나 소유권 문제로 되돌아오면 결국 국가는 임금의 명의로 된 부동산이었다. 근대 민주공화국 체제를 접하기 전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마도 민주주의 체제를 에이브러햄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사용한 것만큼 간명하게, 그리고 완전에 가깝게 정리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 말의 위대한 점은 정말 쉬우면서도 거짓이나 생략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 체제 역시 이 문장과 정확히 같은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조선의 주권자는 임금이었고, 혁명 주체는 사대부였으며, 혁명의 목적은 백성의 삶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을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바로 다음과 같은 문구일 것이다. “임금의, 사대부에 의한, 백성을 위한”
_222-223쪽, 9장 천명과 혁명 중
한국인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독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현대 한국의 기준에서 독재라는 사실은 자주 간과된다. 태종은 동시대 외국의 군주들은 물론 현대의 독재자들보다도 훨씬 불편한 생활과 많은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그는 왕이 되는 데 성공하고 왕권(王權)이 신권(臣權)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결국 정도전이 세운 나라의 왕이라는 틀 밖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태종은 정도전의 조선 설계도면 거의 전부를 물려받았다. 정도전은 공식적으로만 역적이었을 뿐 조선왕조 내내 조선 사대부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무력은 철학자를 죽일 수 있지만, 철학을 이기지는 못한다. ‘왕의 나라’ 조선의 군주는 결국 ‘사대부에 의한 나라’에 갇힌 존귀한 포로였다. 동시에 사대부 역시도 그들 자신에게 부과한 도덕률의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_249쪽, 10장 임금의 중
20세기 한국 역사학자들은 유학이 서구의 실용적 기술에 패배했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실학’이라는 없던 단어를 억지로 만들어냈다. 그들은 ‘고리타분한 유학’과 ‘현실적인 실학’을 인위적으로 분리해냈다. 그다음 ‘우리에게도 실학자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유학자들 속에서 주장에 맞아떨어져 보이는 이들을 솎아내 ‘실학자’라고 이름 붙였다. 마침내 실학과 실학자의 존재를 정설로 만들어내 교과서에 싣기까지 했다. 실학(實學)이라는 말에는 기존의 유학이 뜬구름 잡는 허학(虛學)이라는 가히 폭력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는 ‘유학자’로서 실용을 추구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유학은 한번도 실학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_265쪽, 11장 사대부에 의한 중
한국의 미디어 콘텐츠는 조선을 고답적인 신분제 사회로 묘사한다. 이는 현대인의 기준에서 조선의 신분제가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탓이다. 현대 한국의 창작자들과 소비자들은 조선에 화를 내는 셈이다. 한국인은 평등하지 않은 것에 매우 분노한다. 그러나 거꾸로, 평등을 당연하게 여기는 기질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조선은 모두가 잘 먹어야 한다는 관념에서는 공산주의적 면모를 지녔으면서도, 성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무척 자본주의적이었다.
_290쪽, 12장 백성을 위한 중
조선의 건국자들에게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나라를 세웠다는 나르시시즘의 흔적이 보인다. 조선 사대부는 나라가 망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에 사는 문명인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살았다. 조선 초기의 임금인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에서 음양의 이치를 거론하며 가장 완전한 문자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신진사대부들은 조선 건국을 단순히 왕가의 성이 바뀌는 역성혁명이 아니라 시대의 전환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고려가 조선으로 바뀐 일은 역사발전이었다. 그들은 타락한 고려를 부정했으면서도, 조선도 언젠가 고려처럼 중환자가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스스로가 ‘역사의 종말’ 즉 더는 발전할 여지가 없는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를 완성한 주역이라고 믿었다. 참으로 장대한 포부지만 결과는 오답이었다. 그들의 사명감은 존중하지만 틀린 건 틀린 거다. 결국 조선은 말기로 갈수록 선지자 무함마드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끝났다고 믿은 이슬람 문명이 오랫동안 인식의 진화 없이 정체기를 겪고 있는 현상을 닮아갔다.
_330쪽, 13장 조선의 몰락 중
현재는 미국에서, 과거에는 중국에서 성공한 실험이 한반도에서 완성되는 이 구도는 역사가 깊다. 한국 네티즌은 농담 삼아 미국을 ‘천조국(天祖國)’이라고 부른다. 천조란 중국 황제인 천자의 왕조를 뜻한다. 한국에서 미국 45대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별명은 ‘트황상(皇上, 황제폐하)’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다. 비록 원조보다 규모는 작지만, 대신 더 순수하고 철저한 중화라는 뜻이다. 한국인은 오랫동안 ‘중화’ 즉 세계중심을 모방하고 출품작을 내밀고, 나중에는 실력자가 되는 일을 역사적으로 훈련해왔다. 대한민국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부터 세계에서 인정받는 선진국을 목표로 했다. 한국인은 남들보다 못난 상태를 견딜 수 없어 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차지하는 것, 그것은 생존전략이자 사회정의다.
_345-346쪽, 결어: 한국인의 탄생 중
귀주대첩은 고려라는 나라의 국운 전부를 건 백척간두의 싸움으로, 강감찬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휘한 생애 유일의 전투이자 천재적 걸작이다. 장원급제자였음에도 오래도록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인물이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보여준 애국심과 집중력, 천재성은 한국사에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비범하다.
귀주대첩을 굳이 비판한다면 설계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귀주대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전투 국면을 보면 유사시에 가동할 ‘플랜 B’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고려가 그만큼 절박했으며, 하나의 전투 설계에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걸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판은 불가능하지는 않되, 무의미하다.
_382쪽, 권말 특별 부록: ‘귀주대첩’ 전투에 관한 하나의 주장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