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바다연대기는 아직 미궁의 세계이다. 불교사의 전개와 그 전파의 파장은 바다를 통하여 가장 먼데까지 작동되었다. 스리랑카와 동남아 등 바닷길로 전파되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 홍해의 항구 베레니카에서 불상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명·청대에는 유라시아 극동의 아무르강변과 사할린까지 관음당이 존재했던 비석이 프리모리예 박물관에 전해온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수미일관되게 바다를 통한 불교의 연대기에 주목한다.
저자는 이십여 년에 걸친 현장조사에 입각하여 방대한 분량의 『해양실크로드문명사』를 출간하고, 이의 자매편에 해당될 수 있는 『바다로 간 붓다-세계불교 바다연대기』를 마무리하므로써 인도양과 태평양에 걸쳐있는 아시아의 바닷길을 마감한다. 이 책은 ‘유럽 이전의 바닷길’로서 아시아문명을 형성시킨 바닷길 네트워크의 원형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페르낭 브로델이 ‘액체의 역사’를 주창하였듯이, 이 책 역시 문명이 오고간 액체의 역사를 불교를 매개로 보여주고 있다. 불교의 바닷길은 이제부터 논의가 본격화할 것이며,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되리라 믿는다.
불교의 남전과 북전
불교의 동전(東傳)은 그야말로 도식일 뿐이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직선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여러 나라와 지역, 민족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 교류와 상호 영향의 역사로서,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산물이다. 불교의 바닷길에서 남전불교가 중요하다. 남전불교는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 등을 포함한 동남아에 전파된 스리랑카 대사파(大寺派, Mahaviharavasin)의 상좌부불교를 일컫는다. 북전불교는 북인도에서 서역을 걸쳐서 동아시아에 전해진 불교와 네팔·티베트를 경유하여 몽고 일대에 전해진 불교를 총칭한다.
남전·북전의 구별법은 19세기에 불교연구를 시작했던 서구 학자들이 팔리어계통의 불전이 유행하는 동남아 불교에 대하여 남방불교 이름을 붙였고, 반면에 범어 불전과 그 번역이 유행한 지역의 불교를 인도에서 북쪽으로 전파되었다고 하여 북전불교라 불렀다. 팔리어 또는 범어불전이 모두 인도에 근원을 두고 있으므로 엄밀하게 남전과 북전으로 이분하는 것이 적절한 분류법이 아니다.
이 책은 동남아 불교사나 상좌부불교에 방점을 찍는 연구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남방의 바닷길로 이들 불교가 이동하였으며, 오늘날도 최대의 불교국가로 남아있는 이들 남방불교의 바닷길을 주목하는 것이다. 황금의 땅 수바르나푸미는 오랜 고대적 서사이며, 아소카가 보낸 전교사가 기원전에 이 땅에 당도한 기록이 있다. 오늘의 태국불교는 고대 몬-드바라바티 문화에 그 뿌리를 둔다. 교지[통킹만] 바닷길로 내려온 베트남 불교는 중국 남부의 선종 영향권에 놓여있으며, 스리위자야 불교도 초기 불교의 대승전통과 후대의 밀교전통을 모두 갖고 있다. 반면에 베트남 남부 짬파불교의 동즈엉유적은 북방 선종이 아닌 남방 바닷길로 당도한 불교이다.
뱅골만, 불교사 서막의 근원적인 바다
불교사는 동터오는 갠지스의 여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갠지스강은 벵골만을 살찌우는 젖줄이었다. 강과 바다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경향이 일반적인데 강과 바다는 하나로 작동되고 있었다. 고대 항구는 해항(海港)이 아니라 대부분 강항(江港)이었다. 구법승들이 자주 이용한 탐라립티 항구도 갠지스의 강항이자 벵골만 출입구였다. 불교 4대 성지도 모두 갠지스강가다. 탄생지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 그리고 대각을 이룬 후에 첫 설법을 행한 사르나트가 그 곳이다. 갠지스를 끼고 있는 마가다국은 당연히 바다와 소통하였으며, 벵골만은 불교사 서막에서 근원적인 바다였다.
마우리아제국 파탈리푸트라는 갠지스강을 끼고서 동서로 소통하고 있었으며, 파탈리푸트라는 이후 숭가와 굽타왕조에서도 수도 역할을 맡았다. 벵골만은 인도 입장에서는 동해이지만 벵골라데시, 미얀마, 말레이반도 사람에게는 서해다. 벵골만은 인도아대륙의 남동부에 자리잡은 스리랑카 북쪽까지 펼쳐진다. 벵골만에 부는 몬순 북풍은 배를 내밀어 손쉽게 스리랑카에 닿게 한다. 벵골만 바닷길은 북방에서 내려온 불교가 동남아로 전파되는 루트였으며 힌두교도 벵골만을 가로질렀다. 불교가 갠지스강가에서 숙성되고 벵골만에서 확산되었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불교사를 인도양학이나 세계사 관점에 맞추어 재구성할 필요
벵골만에서 바다를 건너가서 당도한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동시에 벵골만 동쪽으로 내려가 미얀마 바닷가에 불교가 안착하였으며, 수완나부미라 부르던 황금의 땅 동남아의 전교가 시작되었다. 아소카가 무참한 전쟁을 치른 칼링가는 오늘의 오딧샤 해역권으로 동남아로 향하는 무수한 선단의 근거지였다.
스리랑카와 동남아 불교 교섭은 전적으로 선편을 이용하였다. 스리랑카에서 미얀마와 태국 등지로 불교가 전파되었던 반면에, 스리랑카 불교가 타밀족의 침략으로 와해·단절 위기에 처했을 때 동남아 불교가 서쪽으로 향하여 스리랑카불교를 재건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불교전파는 동진만이 아니라 서진도 존재하며, 북진과 남진이 모두 존재했다.
북방세력이 제대로 경략하지 못했던 중부 데칸과 남부 타밀은 상대적 독자성을 지니고 드라비다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드라비다적 정체성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왕조 아소카시대에 본격화한 새로운 역사이다. 오랫동안 불교연구는 인도 북부와 북서부, 중앙아시아[서역] 등 북방자료에 치우친 탓에 남인도 불교는 축소 서술되고 있다. 따라서 데칸 불교유산을 좀 더 넓은 범위의 인도양학이나 세계사 관점에 맞추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뱅골만을 통하여 해양불교사의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붓다고사가 스리랑카에서 주석을 붙인 불경이 바다를 건너 오늘의 미얀마에 당도한다. 붓다고사가 주도하여 싱할라 불경의 팔리어 번역 주석본이 대장경으로 결집되어 타톤에 당도하였고 상좌부불교의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아프리카에 당도한 불교
서쪽에는 서역이라는 각별한 공간이 존재했다. 인도-그리스왕국이 존재하던 공간이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헬레니즘 제국에게 육로만이 아니라 인도양 바닷길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리스 선단은 부단없이 인도양에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헬레니즘 제국이 육로만을 이용하였다는 시각은 올바르지 않다.
아라비아해 연안의 바리가자, 소파라 같은 항구는 로마무역상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스트라보 같은 로마작가는 ‘인도에서 수입되는 엄청난 양의 향료 때문에 로마의 금화가 고갈되어 간다’고 걱정하였다. 아라비아해 콘칸의 경제적 토대가 바로 서인도의 살세타섬 칸헤리 석굴사원 등 대규모 불사를 가능케하였다. 근년에 홍해의 인도양 창구인 아프리카 베레니카 항구유적에서 불상이 발굴된 것은 사시하는 바다 크다. 인도양을 건너 불교가 홍해에 당도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말레이반도의 종교박람회장과 인도인 디아스포라
바다를 건너온 불교의 세례를 가장 먼저 받은 권역은 말레이반도이다. 기원전의 말레이는 동서 중간거점이자 문명 전파의 디딤돌, 혹은 교두보로 작동하고 있었다. 말레이반도에서는 인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비정되는 산스크리트·브라흐미·빨리·팔레바 등 다양한 언어의 비문이 다수 발견된다. 남인도 타밀 상인집단의 흔적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반도, 베트남 해안 등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인도 상인의 광범위한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진 결과다. 그들은 힌두교와 불교를 가지고 왔으며 실제로 이들 종교유적이 다량 남아있다. 같은 유적에서 두 종교 신상이 동시에 발굴되는 경우가 많으므로‘힌두-불교시대’라 부른다.
말레이반도는 후대에 이슬람 술탄왕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통일되지 않은 항시국가 수준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그 왕국들의 실체와 불교의 존재 양상에 관해서는 제한 서술만이 가능하다. 한국의 경우에도 중국문헌에 백제 사신과 만난 것으로 등장하는 랑카수카 정도에 관심을 가질 뿐, 말레이 항시국가에 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다. 중국 역시 자신들 문헌에 등장하는 나라에 관심을 가질 뿐이고, 인도는 말레이 서쪽 방면에 성립된 힌두왕국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스리위자야의 재발견과 남북을 오간 티벳불교
스리위자야는 섬-불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천축과 중국 사이의 징검다리로 기능하면서 천축에 들어가기 전에 언어학습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의정처럼 돌아오는 길에 다시 팔렘방에 들려서 수집한 불경을 한역하기도 했으며 스리위자야는 당대 국제불교 진흥을 적극 옹호 지원하였다. 스리위자에서 자바로 넘어간 불교는 힌두와 불교전통이 혼효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오늘의 인도네시아가 이슬람국가로 넘어가면서 더 이상의 깊은 불교사 천착이 이루어지 못하고 있다.
불교는 바닷길로 남북이 오고가기도 하였다. 오늘날 벵골라데시 출신의 아티샤(Atisha)는 팔라왕국 시절에 북방에서 내려와 스리위자야에서 1011-1023년까지 12년간 체류하였으며, 티베트로 돌아간다. 아티샤는 11세기에 티베트와 수마트라에서 설교하며 대승불교를 전파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티베트와 벵골라데시, 수마트라에 이르는 긴 노선으로 불교가 움직인 것이다. 북방과 남방의 불교는 분리`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와같이 북진`남진을 하였던 것이다.
몸을 내던지던 열망의 시대이자 모험을 불사하던 구법승의 시대
돌아올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머나먼 천축국 여로로 많은 구법승이 떠났다. 남북조시대, 수와 당, 이후의 오대 16국과 송에 이르기까지 구법승은 끊이지 않았다. 반대로 천축승도 동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당대에 가탐에 의해 〈광주통해이도〉가 성립된 것은 남해로를 기점으로 세계체제가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남해로를 통하여 오늘날의 광동성, 복건성, 절강성 등으로 불교가 속속 당도하였다.
불법은 구전으로 전승되어오다가 몇 차례 결집을 통해 모아졌다. 구술전통에서 문헌전통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쳤으며, 구법승들은 불경 하나를 구하기 위해 천신만고 노력하였다. 수입 불경이 한역되어 한역불경의 시대를 열었다. 천축승이 활발하던 시대는 불경을 구하기 위해 신앙적 열정에 몸을 내던지던 열망의 시대이자 모험을 불사하는 헌신의 시대였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읽는 많은 불경들이 이같은 도전과 모험을 통하여 전해지는 중이다.
천축과 중국으로 바다를 가로지른 한반도와 일본의 구법승들
한반도에서도 부단 없이 천축으로 향하였다. 혜초가 좋은 예다. 그러나 중국이 오대산 문수보살, 보타산 관음보살 등으로 중국 땅 자체에서 구현처를 설정하게 되자 천축 보다는 중국으로 가는 뱃길을 부단없이 오고가게 되었다. 의상이 주산군도 보타산에서 관음을 모셔와 낙산사에서 관음신앙을 열게 된 것이 좋은 예다. 일찍이 가야의 불교나 백제의 불교는 바다를 통해 열려졌으며, 특히 마라난타의 당도가 의미하는 남조와의 바닷길은 구체적인 것이 밝혀지지 않은 미궁의 역사이나 해양불교의 중요 사건으로 기록된다. 남북조시대 무수하게 많은 신라승의 당나라 및 천축행 기록,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볍화사 성립 등은 불교 바닷길의 지속성을 잘 말해준다. 남북조시대 불교사 서술에서 발해가 있으므로 하여, 환동해를 통한 발해불교의 바닷길 서술도 가능할 것이다.
일본불교의 특질은‘섬-불교’라는 점이다. 스리랑카와 스리위자야, 그리고 일본 불교, 뒤늦게 시작된 타이완 불교까지 ‘섬 -불교’는 전파의 속성과 수단에서 뱃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일본 열도는 1차적으로 한반도에서 해협을 건너온 불교의 강력한 세례를 받았으며, 당연히 바다 건너 중국의 세례도 받으면서 독특한 ‘섬-불교’를 키워나갔다. 예닌의 구법 순례나 중국승 감진의 입국 등 일본불교사의 중요사건이 바다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섬이라는 고립 조건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전란 등의 피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하였으며, 고대 이래의 불교유산을 간직한 드문 경우이다. 뒤늦게 일본에 편입된 역사이지만, 본디 독립왕국이었던 류큐의 불교사에서 돋보이는 미륵신앙을 주목한다. 류큐 미야코지마(宮古島)의 미륵신앙은 바다를 건너온 불교의 대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