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7~8 이들의 작품은 형식과 내용만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있는 미술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우리의 삶과 역사의 질곡이 함께 담겨 있다. 즉 일종의 자화상과도 같은 우리의 옛 모습이 그들의 작품에 반추되어 있다. 그 모습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시대의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미술사가들이 연구해야 할 일차적인 과제일 것이다.
P. 41~42 미술도 사람의 일이라 사람이 그림보다 앞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람을 우선 보고 그 후에 작품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연구자인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그의 인품과 삶에서 많은 감명을 얻었고,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 더욱 애정을 느끼고 공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까지 장욱진을 그런 일화와 감성 안에 가두어 둘 것인가? 이제 장욱진을 말할 때 그의 일화와 함께 그의 작품들이 차지하는 미술사적 위치와 형식적인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P. 70 장욱진은 원천적으로 그의 성격상 삶과 작품의 진정성을 버릴 수 없는 작가이다. 그러한 진정성이 때에 따라서는 일상에서 극단적인 생활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작품에 나타난 진정성 역시 그러한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풀이할 수 있다. 한 예로 그렇게 순수하게 노출되었거나 혹은 관조적인 일상을 지닌 그가 작업에 관한 한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과 이성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균형과 절제의 함축적인 상징기제들은 유아적이거나 유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어른스럽고 이성적인 통제력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P. 83~85 그림은 규모에 의해 그 가치의 질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크기에 관한 물리적인 비례의 비교가 이론적으로 성립되더라도 일단 독립된 프레임은 그것을 운용하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그 자체 내에 무한한 포맷과 이미지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유비쿼터스 세계인 것이다. 장욱진의 작은 그림들이 바로 이렇다. 텅 빈 큰 화면에 점 하나 찍어놓고 억대를 호가하는 작품이나, 장욱진의 엽서만 한 작은 그림이 비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162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조형요소들은 그것의 시각적인 외형을 빌려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닌 순수함과 간결함의 원시적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작품에서 전통적인 소재를 수용할 때 그것을 작가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와 그릇에 담지 못한다 면 그 소재의 진정한 문화적 정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 우리가 ‘한국적인 정체성’을 말할 때 그것은 곧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며 작가의 독창 성과 직결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독창적이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이지, 한국적이기 때문에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P. 204~205 하지만 1천여 점(먹그림 포함)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 중 불교적 그림이 겨우 30여 점에 불과한 것을 볼 때, 그의 작품세계에서 불교와의 관련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도교의 노장老莊사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작품세계는 노장사상뿐만이 아니라 불교와 전통적인 무속巫俗과 민화, 설화 등의 요소가 자전성을 바탕으로 서로 종합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럼에도 나의 판단에는 장욱진이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이며, 그것은 작품 자체의 도상이나 주제보다는 작가적인 인식과 태도, 그리고 예술이라는 개념에 관한 부분에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P. 211 오랫동안 친밀한 소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탈속적이고 이상화된 풍경, 가족을 그리워하는 모습, 때로는 신선 같은 모습, 해와 달이 동시에 뜨고 사물의 크기와 위치가 우주의 자연법칙을 거 스른 채 표현된 화면들은 일견 동화적이고 향토적으로 보인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장욱진의 화면들은 한결같이 현세의 ‘나’를 벗어난 상태를 보여준다. 그만큼 자전적이며 이상적이고, 나아가 화면에 구현된 세계는 자연과 합일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道家사상에 가깝다. 자연에서의 깨우침이나 ‘나’의 내면에서의 깨우침 모두 어떠한 경지의 ‘도道’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다를 바가 없다.
P. 235~236 요컨대 앞선 질문의 해답은 자연에 있다. 장욱진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과 이분법으로 대립하는 자연이 아니다. 인간과 동식물을 가르지 않는 포괄적인 시공간의 세계이다. 작가는 그 세계의 주변 사물들을 애정으로 보듬는다. 생명은 생명의 고귀함으로, 무생물에게도 애정을 담아 정성껏 의미를 부여한다. 각각의 도상들은 마치 생명체로 환생해 지속적인 이 세계를 떠돌고,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만난다.
여기서 장욱진의 그림은 미학적 모더니즘의 굴레, 틀(형식), 한계를 벗어난다. ‘위선’을 인간의 가장 큰 죄라 여기는 그는 ‘목적’ 있는 말을 일절 하지 못한다. 그는 인간사를 떠나 자연까지도 인간의 목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연으로부터 추출되어 화면으로 옮겨진 도상들 역시 그림을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장욱진은 무엇을 미리 설정해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