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남해에서 드물게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마을. 그 앞바다 위로 뜨거운 태양이 떠오른다. 이곳은 남해에서 제일 먼저 뜨는 해를 받아 농사짓는 다랭이마을이다. 거친 파도가 때리는 바닷가 절벽에서 가파르게 산이 이어졌다. 그 산을 층층이 깎아 만든 터전이 다랭이(다랑)논이다.
다랭이논으로 이름난 이곳은 생명의 중심지다.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양을 한 남해 섬의 회음부에 자리 잡고 있어 새 생명을 잉태할 신성한 곳이다. 그 실마리는 바다로 가는 다랑논에 있는 암수바위에 있다. 바닷가 언덕에서 시작된 삶의 터전은 마을 양옆, 양수를 보급해 주는 하천川에서 시작한다. 개울물은 마을의 생명수다. 마을 앞에는 대양으로 나가는 바다가 있고, 응봉산과 매봉산, 설흘산이 양팔 벌려 마을을 감싸듯 품고 있다.
등고선처럼 이어진 다랭이논과 바다가 조화를 이룬 이곳은 사람이 살아온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경상남도 기념물 제247호인 설흘산 봉수대와 민속자료인 암수바위의 전설로 미루어 보아 고려 이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중엽 이전에는 마을 이름을 간천間川이라 했고, 그 후 가천加川이라 불러 오다가 2022년 1월 1일부터 다랭이마을로 명명했다.
다랭이마을은 국가유산청이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15호)로 지정했다. 문화재는 가옥이나 건축, 예술품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곳에서 증명한다. 민초의 땀으로 개척한 층층 계단 논도 문화적 가치가 된다는 뜻이다.
남해 섬은 예부터 살림이 궁했다. 섬이라기보다 바다에 불쑥 솟은 산에 가까워 논과 밭이 산비탈에 기대어 있다. 다랭이마을은 설흘산 모롱이에 터를 잡아 유달리 지형이 거칠다. 마을 앞에 큰 바다가 펼쳐져 있지만, 해안선이 벼랑이라 배 한 척 의지할 수 없다. 오죽하면 이웃 마을에서 이곳으로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했을까. 강인한 고향 사람들은 바닷가 산비탈을 생긴 대로 깎아 터를 일구어 생계를 이어왔다. 경사진 곳에 터를 잡을 수밖에 없는 집도 힘겹게 마을 사람들처럼 낮은 지붕을 쓰고서 기대어 있다.
고향의 터전은 선조들이 정착하면서 벼랑 끝에 제비집을 짓듯 일구었다. 농토를 한 뼘이라도 더 넓히려는 윗대 어른들이 산비탈을 깎고 석축을 쌓아 계단처럼 농토를 만들었다. 선조들의 지혜와 땀이 밴 한 뼘의 땅은 민초들의 희망이며 터전이었다. 45도의 가파른 언덕이라 터전을 일구기엔 버거웠겠지만, 하나둘씩 느는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산비탈의 거친 땅을 쓸모 있는 토지로 만들어야 했다.
이곳의 터전을 지키는 건 인간뿐만이 아니다. 무덤, 바위, 나무도 한몫을 한다. 매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며 제를 올리는 밥무덤이 있고, 대표적인 바위로는 암수바위와 너럭바위, 거북바위가 있다. 터줏대감 같은 나무 몇 그루도 마을을 지킨다. 마을회관 옆에 선 상수리나무와 정류장으로 오르는 길가에 선 이팝나무, 방풍림 역할을 하는 느티나무도 있다. - 〈터전〉 중에서
오랜 방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방랑이란 자기 안에 있으나 발굴하지 못한 그 무엇을 찾아 떠나는 길이고, 귀향은 힘들고 외로운 방랑을 거쳐 비로소 고향 집 문 앞에 서는 일이다. 긴긴 방랑을 거친 후, 닿게 되는 귀향의 의미는 본래 자아에 대한 깨달음의 은유라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남으로 온 까닭이다. - 〈꿈〉 중에서
전어 만 원어치로 잔치를 열었다. 우리 식구와 뒷집 엄마, 고양이 가족까지 포식했다. 마루에 앉아 오랜만에 소주 한잔을 걸쳤더니 얼떨떨하다. 술을 즐겨 마시지는 않지만, 주량까지 적으니 한 잔 술에도 취기가 돈다. 해무에 술기운까지 더해지니 앞산이 보이지 않는다. 앞산이 보이지 않는 건 낮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전어 탓이다. - 〈전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