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오늘을 살아내는 일. 이렇게든 저렇게든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거다.
_「괜찮다고 대답한다」 중에서
아직 따뜻하다. 어머니 목욕을 시켜드려야겠다. 아내가 없는 사이에. 어머니의 목욕을 거들어본 적 없는 아내가 행여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자신의 맨몸을 며느리가 볼까 염려하는 어머니가 서글퍼지지 않도록. 그러나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일 뿐이다. 사실 나는 아내의 마음이나 어머니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넘겨짚고 추측할 뿐이지만,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마 이런 것들이지 싶다. 누군가의 진심을 헤아린다는 건 모험이 따르는 일이니까. 고무장갑을 벗어 소리 나게 털거나 설거지하고 그릇 내려놓는 소리가 시끄러워도 나는 아내의 낯빛을 살핀다. 손길 움직임 하나 미세한 떨림조차 다 귀에 들리는 순간들이 있다.
_「괜찮다고 대답한다」 중에서
세상은 살아갈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 누군 기필코 살고 누군 기어이 죽는다. 누군 호강에 겹고 누군 버겁게 고생한다. 또 어떤 이는 심심해 죽겠고 어떤 이는 바빠서 죽겠다. 어떤 이는 지지리 가난하고 어떤 이는 각별하게 부자다. 누군 속터지게 말이 없고 누군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고개 숙인 사람, 고개 쳐든 사람. 너무 철학적이었는지 골이 아프다. 욱신거리는 골이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소변이 마렵다고. 뇌 속의 관리 감독관은 역시 고급인력이다. 이런 생리적인 것들은 자기들이 나서지 않고 신호체계로 알려주니 말이다.
_「괜찮다고 대답한다」 중에서
나도 좋았다고. 하지만 두려웠다고. 은하와 함께 햇살 들어오는 집의 창문과 따뜻한 실내 그리고 튼튼한 집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는 시간이 불현듯 찾아오면 당황한 은하가 울상이 된 채 말했다. 믿고 싶었다고. 내가 한 얘기에 꿈을 꿀 수 있었다고. 거짓말쟁이가 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은하를 힘들게 하는 인간은 그게 누구든 죽이고 싶었다. 부당한 대접을 하는 상사나 운전 중 위험하게 끼어들어 사고를 일으킬 뻔한 트럭 기사 그리고 언어폭력으로 마음에 상처를 준 인간들.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친구도.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른 채 학대가 일상이 된 누군가에게 오래전 야구 배트 잡은 손에 느꼈을 감각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니까. 폭력은 갚는 게 아니니까.
_「그 한 가지」 중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참 좋아.
바깥에서 보는 실내 풍경이 좋으면 어떨까, 자주 생각해.
밖에서 안이 보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은하가 준수를 언뜻 바라보고는 웃었다.
나는 가끔 커다란 창문을 그려. 큰 창문으로 보면 내가 꿈꾸는 풍경이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이렇게 등을 돌리고 앉아봐.
준수가 일어나 은하의 의자 등받이를 돌려주었다. 자신도 창문을 등지고 앉았다.
미닫이창이 있고 붙박이창도 있어. 여닫을 수 있는 창도 있고 내려 닫을 수 있는 창도 있지. 형태나 크기는 여러 가지지만 창은 집에 빛을 주기 위해서 만드는 거야. 보여? 햇살이 집에 들어와 있어.
그러네. 따뜻해.
은하의 발가락에 햇살이 앉아 있었다.
_「그 한 가지」 중에서
가늠하기 어려운 건 길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심장이 언제 곤두박질칠지, 흔들리던 눈길이 어느 순간 하얗게 사라진 길을 쫓고 있을지, 머리는 어느 순간 먹통이 되어 판단력을 잃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오롯이 혼자 빠져나가야 하는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추월하는 차들처럼 공포가 뒤에서 쏜살같이 쫓아오며 굉음을 냈다. 핸들이 저절로 움직인 것처럼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럴 땐 차라리 터널 벽에 차 머리를 박고 그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_「그는 사랑했습니다」 중에서
버스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도로가 혼잡한 탓에 버스 전용 차선조차 밀려 있었다. 보행 신호가 켜졌는데도 차들은 사람들이 건너갈 공간을 다 내주지 못했다. 좁아진 횡단보도 위로 사람들이 차를 피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건넜다. 문득 살아가는 일이 건널목을 건너는 일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나 대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길. 살아내고 죽어가는 일이 몰래 이어지는, 그러나 그저 건너가면 되는 길이다.
_「어제의 눈물 그로부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