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그들 자신의 이야기-청소년소설의 시작을 알린 작품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20주년 기념 개정판 출간!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는 2004년 당시 동화를 쓰던 이경혜 작가가 처음으로 쓴 청소년소설이다. ‘청소년소설’이라는 장르 명칭도 생소하던 시절이라 처음에는 ‘중학생 소설’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었다. 예전에는 청소년이 별도의 독자로 취급되지 않아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십대들은 어리둥절한 채 어른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대부분의 서점에 청소년책 코너가 따로 있고 청소년소설을 즐겨 읽는 성인 독자들이 있을 정도다. 오늘날 청소년소설이 어엿한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는 데 있어 중심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작품, 그리고 지금까지 재쇄를 거듭하며 여전히 청소년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는 책.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가 출간 20주년을 맞아 개정판을 출간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중학생 진유미로, 유미는 교복 치마를 짧게 올려 입고 귀 뚫고 화장하는 ‘날라리’ 여학생이다.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재혼, 터울이 많이 나는 성이 다른 남동생 등 자신의 가정환경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충분히 이해하고 아랑곳하지 않는 당찬 십대이기도 하다. 담배도 피우는 유미에게 다른 또래 친구들은 ‘지독한 겁쟁이에 한심한 모범생’으로 보일 뿐. 전학 간 학교에서 귀를 뚫었다는 이유로 “너 같은 애가 크면 딱 술집 여자가 되는 거야”라는 막말을 듣자 유미는 담임에게 “선생님도 귀 뚫으셨잖아요? 선생님도 술집 나가세요?”라고 대꾸한다. 또다른 주인공 재준이는 그런 유미에게 관심과 호감을 보이며 다가온 ‘남자사람친구’이자 유일한 단짝 친구이다.
이야기는 재준이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고, 유미가 재준이 어머니로부터 재준이가 남긴 일기장을 건네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서로의 짝사랑 실패를 위로해주던 크리스마스에 유미가 재준이에게 선물했던 파란색 일기장. 그러나 유미는 재준이의 일기장 첫 페이지에 적힌 문장을 보고 경악한 나머지 더 이상 쉽게 일기장을 넘기지 못한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재준이는 혹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했던 걸까? 어쩌면 재준이의 죽음에 어떤 의도나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닐까? 혹시 재준이에게 내가 몰랐던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나? 고통스럽지만 어렵사리 재준이의 일기를 읽어나가던 유미는 마침내 그간 몰랐던 재준이의 삶에 깊숙이 도달하게 된다.
“슬픈 죽음의 이야기가 환한 삶의 기반이 될 수 있기를,
보다 소중한 삶의 순간을 누리는 힘이 될 수 있기를”
당혹스러운 질문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수수께끼 같은 재준이의 삶과 죽음을 추적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슬픔에 빠진 유미가 애도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알고 보니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문장은 재준이가 매일매일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시체놀이’에 힌트를 얻어 죽은 사람에게 자신이 살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어떤 의미를 지닐지 생각하고, 그날그날 성찰한 내용을 일기장에 담아낸 것이다. 일기장에는 가족에게 느끼는 애정과 책임감, 유미와의 끈끈한 우정, 짝사랑하는 소희에 대한 설렘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고, 유미는 일기장을 통해 재준이가 그 누구보다 충실하고 열정적으로 하루하루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재준이가 유미 곁에 남아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혼자 남은 유미는 살아생전 재준이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비로소 재준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문제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2000년대 초반은 십대 오토바이족들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던 때였다. 실제로 작가는 2001년 한 소년의 죽음을 전해 듣고 비통한 마음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소년을 기리기 위해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한 소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작가의 말대로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어린 넋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토바이 사고가 일부 불량 학생과 청년들의 비행으로 치부되던 시절, 작가는 거기에 담긴 특별한 의미와 정서를 읽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작가는 ‘어른이 해서 나쁜 짓이 아니라면 아이가 해서도 나쁜 짓은 아니며 아이가 해서 나쁜 짓이라면 그건 어른이 해도 나쁜 짓이라고’ 단언한다. 화장하고 담배 피우는 여자 중학생과 오토바이 타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자 중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이라고 할 만했다. 사회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기준으로 어린 세대를 재단하고 지적하고 계도에 나설 때 아이들에게도 입이 있고 목소리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여기’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청소년소설이 시작되었다고 볼 때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가 청소년소설 장르가 성립되는 데 기여한 바는 보다 분명해진다. 20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니만큼 두발과 복장 규제, 훈계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던 교사의 막말 등 당시 억압적인 학교 현장의 실상과 갖가지 사회적 편견이 잘 담겨 있고 당시 십대들의 고민과 욕망도 충실히 그려져 있다. 모든 클래식이 그렇듯 사회문화적 민속지의 역할도 겸하고 있지만 등장인물 각자의 감정과 생각, 행동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20년 전 청소년 유미와 재준이가 당면했던 문제들은 지금 얼마나 해결되었을까. 20년이란 한 사람이 태어나 성년에 이를 만큼 긴 시간이다. 이 책의 초판을 읽었던 당시 청소년 독자들은 이제 부모가 되어 기성세대에 진입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마침내 세대를 건너 공유할 만한 청소년소설을 갖게 된 셈이다. 이번 개정판을 맞아 작가는 “슬픈 죽음의 이야기가 환한 삶의 기반이 될 수 있기를, 보다 소중한 삶의 순간을 누리는 힘이 될 수 있기를” 하는 바람을 전했다. 삶을 좀더 충만하게 누리고 소중히 여기라는 것만큼 청소년 독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또 있을까. 이것이 바로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가 20년간 꾸준히 읽혀온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