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한 얼굴의 모성
‘누가 아이를 아프게 하는가’
시작부터 병원으로 안내하는 정해연은 일곱 살 남자아이를 예사롭지 않게 조명하며 순식간에 우리를 불안 섞인 공간으로 들인다. 소설집의 첫 번째 소설 「관심이 필요해」에 등장하는 아이의 이름은 영우. 갖은 병명으로 한 달에 한두 번은 병원을 찾는 단골 환자다. 또다시 이 주만에 폐렴으로 입원한 영우를 보며 의사 중혁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의 눈은 아이가 아닌 아이의 엄마를 향해 있다.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몰라요. 나도 환자 간호했다면 한 사람인데 저렇게 지극정성은 또 처음 봐요.”
“엄마라도 좀 쉬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그렇지. 밤에 잠도 거의 안 자는 것 같더만.”
“대단하세요. 볼 때마다 영우 물수건 갈아주러 쉴 틈 없이 다니시던걸요.”
영우 엄마를 극찬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들으면서 쑥쓰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중혁은 기묘함을 느낀다. 그리고 예전부터 해오던 의심을 확신으로 굳혀간다. 영우 엄마가, 아픈 사람을 보살피며 타인의 관심과 칭찬을 받으려는 정신질환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이라는 의심 말이다. 환자가 나으면 더 이상 관심을 받을 수 없으므로 아이를 계속 아프게 만드는 잔인한 엄마의 모습은, 중혁의 어린 시절 경험한 모성에 기인한다. 그렇게 중혁은 영우에 이입하며 아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지켜지지 못했던 자신을 돌보는 마음으로 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중혁은 아동학대의 정황을 목격하고 영우를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입원을 간절히 바라는 아이의 모습에 울분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악마 같은 영우 엄마를 경찰에 신고하고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너무도 예상 밖이었다.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보편적 희원에 함유된 과다한 욕망
기체에 가까운 참혹한 현실에 대하여
두 번째 소설 「드림 카」는 마이바흐의 푹신한 시트에 앉은 채 시작된다. 많은 이가 ‘꿈의 차’라 일컫는 마이바흐가 껌값인 인우. 그는 불과 이 년의 투자로 막대한 부를 이뤘다. 성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던 인우의 사정이 180도 바뀌자 그를 둘러싼 많은 것―관계, 대우, 시선―이 달라지고, 인우는 복수라도 하듯 그 모든 것을 조소하며 즐긴다.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이바흐를 타고 인우가 향하는 곳은 여자 친구 혜란의 집 앞. 속물인 그녀가 차를 보고 얼마나 흥분할지 기대하며 기세등등하게 마이바흐의 시동을 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 터널 진입 직전 무언가가, 아니 누군가가 있었다.
여자는 흰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는 사방으로 흩날렸다. 얼굴 한구석이 함몰되어 있었고, 그 흉물스러운 상처를 따라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는 여자의 흰 원피스를 적시고 가느다란 다리를 따라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여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금세 사라진 여자,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달리는 다른 차들. 인우는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차에 오르지만 공포는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이로부터 존재를 확인받으며 인우의 두려움은 증폭되어간다. 마이바흐의 속력을 아무리 높여봐도 어딘가에 들러붙어 차 안까지 잠식해오는 공포는 인우를 공격하고, 끝내 우리에게 실체를 드러낸다. 소설이 끝날 무렵,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고 공포의 정체가 선명해지지만 불안은 소거되지 않는다. 해설을 쓴 성현아 평론가의 말처럼 “공포스러운 상황 자체가 종결되었음에도 공포가 이어”지고, “이때의 참혹한 현실”은 마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쉬운 기체에 가깝”게 남겨진다.
녹은 듯 흘러내리는 정당한 분노
숨 쉬듯 행해지는 가학의 역사
엉뚱한 상상이 지독한 현실을 기반으로 펼쳐진다면 어떨까. 예상 못 한 상황들을 신선해하고, 유별난 인물성에 즐거워하고, 뜻밖의 전개에 흥미로울 수 있을까. 과연 그렇게 마냥 즐거울까.
마지막 소설 「말은 안 되지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변화의 시기를 겪는 세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소설의 시작부터, 어제까지 인간이던 나는 하루아침에 ‘말’이 된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비인간이 된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돼지가 아닌 말이 됐다는 것. 돼지로 바뀌는 게 대다수인 사회 속에 희귀한 말이 됐다는 것. “말이 되었군”이라는 간소한 소감으로 담담히 변화를 받아들인 ‘나’와 달리 가족들은 난리가 난다. 그들에게 ‘나’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재앙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해결이 안 된다면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야 했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다는 ‘나’의 외침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털이 밀리고 주둥이가 잘릴 위기에 처한 말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도망밖에 없다.
아무리 항거하고 발버둥 쳐도 내 부모는 기어이 나를 성형외과 침대 위에 눕혀 잠재울 터였다. 이미 나와 내 부모 사이에는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상태라는 걸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 그들은 애초에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나’는 인면수심, 아니 마면수심이란 꼬리표를 감수하고서라도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정의 구현을 마음먹지만 이 사회의 기준이, 통념이 자신을 비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낙담한다. 말에게 허락되는 상식이란 없음을, 차이는 차별을 묵과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마주한 ‘나’의 다음 선택은 어쩌면 가장 말다운 것, 마사회 진입이다.
‘나’는 그곳에서 아주 잠시의 안락을 느낀다. 쉴 새 없이 달리기를 강요당하는 삶 속에서 생각할 틈은 점점 밀폐된다. 주어지는 건 당근과 약물 그리고 세 개의 단어. ‘최고. 일등. 승리.’ 피를 토하고 나서야 ‘나’는 궁금해진다. 대열을 이탈하면, 레이스를 멈추면, 승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고기가 되지.
정신이 아찔했다. 비틀거리는 나를 보고 교관이 히죽 웃었다.
싫으면 달려. 최고가 되라고. 일등 말이야. 레이스에서 승리할 수 있는.
최고. 일등. 승리.
다 최고가 되면 뭐가 남는 겁니까?
고기가 남지.
이 세계의 룰을 알게 된 ‘나’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폭력의 연쇄는 도대체 언제 끝맺어질까. 이 소설은 과연 환상소설이 맞을까.
흐르며 떠다니는 현실과의 대면
도약으로 말미암아 만나는 진짜 현실
현실의 공포를 직조해 가장 낯선 질감의 현실을 펼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정해연다움을 부수어 진짜 정해연다움에 다가선다. 소설을 쓰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작가가, 고통과 불안에 휩싸인 삶이 쓰지 않는 삶보다 견딜만 하다는 작가(에세이 「어떤 작가」)가 구축한 세 개의 세계가 비단 소설로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성현아 평론가가 짚어낸 “정해연의 소설이 검질기게 응시하고 있는” “부재의 자리”에 놓인 우리를 상상한다. 정해연이 새로이 감각하게 한 현실의 입자들에 둘러싸인 “우리가, 웅크려 응고되었다가 서로의 손을 놓치며 기화했다가 징그럽게 들러붙어 우리 안을 흐르기도 하는 다채로운 현실의 물성과 맞닿기를 기대한다.” 현실에서 도약해 “현실과의 접촉면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소설이란 외피를 입은 정해연과 만나게 될 것이다. 무한하게 확장한 현실을 감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