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란의 소설은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 「다정 모를 세계」를 보자. 소설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목록은 현관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택배 상자로 시작해서 청소기, 스피커, 소파, 김치찌개, 식탁 등을 거쳐 녹음 파일로 마무리된다. 이 각각의 사물들은 그 자체로 배우자의 불륜이나 행방불명조차 특별한 사건이 되지 못하는 권태로운 일상의 허무한 공백을 채워주면서 느리지만 착실하게 서사를 진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사물들은 그 원래 용도에 한정되지 않은 채 등장인물과 부딪히거나 다른 사물들과 뒤얽히면서 불투명해지고 불명확해진다. 그래서일까. 이경란의 소설에서 사물들은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면서 인물의 다양한 감정과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매개물 역할에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때 사물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수동적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닌, 거꾸로 인간의 감정과 성격, 심지어 정체성까지 만들어나가는 능동적인 행위자처럼 보인다. 부재하는 준우의 흔적은 “흡입구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 “먼지 뭉치”가 되고, 준우의 무정함과 무심함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상실한 다정은 점점 알갱이가 빠져나가는 “모래시계”, 혹은 “집을 옮기기 전에는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는 육중한 장롱이나 투 매트 침대”와 같은 “물건”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 속 등장인물은 이렇게 비인간, 즉 사물이 되어야만 비로소 서로에게 접근과 이해가 가능한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다정은 남편 준우가 내는 불쾌한 생활 소음 중에서 쩝쩝거리며 먹는 소리를 극도로 싫어하고 이는 그대로 준우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다정은 이 불쾌한 소리를 몰래 녹음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소리에 편안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기계 속으로 흡수된 뒤 녹음 파일이라는 사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녹음 파일을 비롯한 소설 속 사물들은 다정에게 준우라는 대상을 직접 만나지 않도록 해줌으로써 대상에 대한 거부감을 누그러뜨리기도 한다. 준우의 생활 소음은 그렇게 사물이 되어서야 비로소 견딜 만해진 것이다.
「해(害)」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상황과 사물이 돌연 낯설어지며 모든 것이 불가해지는 일이 반복된다. 이 소설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압도적이고 전면적”인 폭우와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소동으로 주인공 ‘미우’가 경험하는 불가해한 감정을 그린다. 계속 쏟아지는 비로 인해 아파트 저층이 침수되자 일층에 사는 가족이 느닷없이 미우가 임시 거주하는 위층 아파트로 대피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렇게 이틀 동안 낯선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미우는 ‘여자’의 요구로 “자동으로 초를 갈아 끼우는 촛대”가 되기도 하고 낯선 ‘남자’와 어둠 속에서 평소에는 마시지도 않던 독주를 나눠 마시기도 한다. 이 “빗방울의 파열음”이 불러일으킨 기이한 정동의 파장은 미우의 남자 친구 경제를 둘러싼 소문(경제가 유린을 성폭행했다는 소문)과 그 밤의 사건에 관한 진실 공방을 떠올리게 한다. 정전과 침수라는 비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우와 남자의 술자리는 바로 미우가 떠난 뒤에도 이어졌던 경제와 유린의 그날 밤 술자리를 재연하고 있다. 처음에 미우는 아이들과 여자가 잠든 상황에서 그들의 아빠이자 남편인 남자와 술을 마시는 행위가 “부도덕하거나 부적절하지는 않은”지 고민한다. 그러나 술에 취하면서 이 모든 고민은 휘발되고 그 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 조각’이 된다. 경제와 유린도 그러지 않았을까. 모두가 술에 취한 그 밤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한들 그 일을 피‘해’와 가‘해’라는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제목 ‘해(害)’는 ‘해되다’일까, 아니면 ‘해하다’일까.
「크리놀린」의 주인공 ‘여인’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스커트 안에 “강철 테를 연결시켜 만든 새장 모양의 구식 크리놀린”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여인의 몸집은 상대적으로 작아져 초라해 보이기조차” 한다. 소설에서는 크리놀린이 여성을 억압하고 가두는 족쇄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예컨대 스커트를 들어서 옮기는 모습을 본 사내는 “꼭 새장에 갇힌 새 같군. 덩치가 좀 크지만 말야”라고 말하면서 새장형 크리놀린을 입은 여성을 새장에 갇힌 새에 비유하기도 한다. 「크리놀린」은 탈-크리놀린한 여성의 각성을 통해 사물이 인간 주체를 어떻게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지, 때로는 위협하거나 각성시키는지, 어떻게 다른 주체와의 관계를 촉진하거나 무화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물은 우리의 짐작보다 훨씬 더 우리 존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못 한 일」에도 다양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미싱, 검정 레자 미니스커트, 그리고 죽은 새. 소설은 주인공 선아 씨가 새의 사체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오토바이나 차에 깔린 것이 분명한 새의 사체는 옷 수선집을 하면서 간신히 살아가는 선아 씨의 고통스러운 현재는 물론 과거 함께 일했던 경자 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선아 씨는 열세 살 무렵 의류공장 시다로 함께 일했던 경자 언니가 수면 부족과 옷 먼지에 시달리면서 환기가 되지 않는 골방에서 잔업과 철야를 반복하다가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각혈하며 죽은 일을 기억한다. 미싱사가 되어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들처럼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싶었던 경자 언니는, 공장에서 쫓겨난 뒤 죽은 새처럼 버려지듯 죽는다. 어린 여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먼지 나는 옷 무더기, 끊임없이 밟아야 하는 미싱)은 이들의 신체와 부딪히면서 이들을 물질적으로 변형시킨다. 그 결과 이들은 죽은 새와 같은 사물이 된다.
이경란의 소설에서 사물은 인간과 어떻게 관계 맺고 인간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따라 수치스럽고 외설적인 인간의 모습을 폭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컨대 「다섯 개의 예각」에서 거북이 ‘별’은 주인공 가족이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는 지극한 돌봄과 배려의 대상이었지만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부터는 무관심과 불만의 대상이 된다. 별을 위해 멀리 떨어진 마트까지 가서 유기농 채소를 샀던 가족은 이제 싸구려 상추 한 장은커녕 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결국 최소한의 배려만으로도 60년 넘게 장수하는 “하등동물” 별은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는다. 소설의 제목 ‘다섯 개의 예각’은 ‘별’의 모양을 풀어서 쓴 표현으로, 이때 ‘예각’은 ‘별’에 덧붙여져 있는 익숙한 관념과 이미지가 감추고 있는 날카롭고 아픈 현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자기희생 없는 배려와 돌봄이 어떤 맥락과 상황 속에서는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특정한 시간적, 공간적 맥락에서 주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때, 사물은 그저 상징으로 회귀될 수 없는 정동의 힘을 지니기도 한다. 「여행시절」은 이렇듯 역사적, 맥락적 위치를 갖는 사물과 그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고유한 정동에 대해 다루고 있다. 번역가인 ‘나’는 중국 신진 소설가들이 아시아 각국의 여행을 모티프로 쓴 동명의 테마소설집을 번역하다가 한국편 소설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임을 깨닫고 뒤늦게 그 시절을 추억한다. 그렇게 추억에 잠겨 소설을 읽다가 ‘나’는 그 당시 타이완 유학생 완이 남몰래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은 비로소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딤섬 부케’를 통해 ‘나’에게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느리게 전달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딤섬 부케’는 “사탕 부케의 사탕 대신 딤섬을 채워 만든 모형”으로, 이는 ‘나’가 축제 때 팔기 위해 밤새 만들었던 사탕 부케와 겹쳐지면서 젊은 시절 남몰래 들끓던 완의 마음이 실리는 사물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이 불러일으킨 감정과 정동은 뒤늦게나마 소설을 통해 ‘나’에게 전달됨으로써 사물의 내러티브는 재구성된다.
그리고 장소들. 이경란의 소설에는 종종 시간의 압력을 받지 않고 아예 시간이 고여 있는 듯한 장소가 등장한다. 그 장소들은 이를테면 현실 속의 비현실, 아니면 사이공간 혹은 ‘낀 곳’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밖에는 꽃과 노래」와 「성북동의 달 없는 밤」은 시간이 축적되지 않고 연속적 흐름이 끊긴 공간, 그래서 사물과 인간들에게서 시간의 흐름이 지워져버린 (공간 아닌) 공간을 담아내고 있다. 「마을 밖에는 꽃과 노래」의 주요 공간인 대숲은 자갈말(자갈마을)과 사막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이자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문지방 같은 장소로 설정되어 있다. 그곳은 외부인에게 열려 있지만 어느 누구도 머무르지 않는 그들(오래된 사물 같은 죽지 않는 노인과 사내아이를 낳아 기르지만 여전히 아이인 ‘아이’)만의 폐쇄된 공간이기도 하다. 소설은 가게 앞 대나무 꼭대기에 걸린 붉은 천과 흰 천 조각을 통해 그곳이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무속적 공간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설 속 ‘대숲’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는 다른 질서와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이질적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이경란 소설은 사물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에 접근하는 사물 중심적 관점을 제시하고 사물과 세계에 대한 한 점 꾸밈없는 사실적 묘사를 통해 이 세계와 사물을, 그리고 인간 존재의 면면을 새롭게 드러낸다. 이경란 소설이 형식의 혁신이나 언어의 실험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는데도 참신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물들의 주관적 정서나 감정을 과장되게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사물에 대한 꼼꼼하고 성실한 기록을 통해 사물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감정과 정동을 천천히 희미하게 퍼뜨리는 이 거꾸로 된 소설 작법이야말로 이경란 소설의 새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