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딩〉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차고 건조한 한랭전선을 따라 북극발 한파가 한반도를 꽁꽁 얼어붙게 한다. 한파가 실어 온 강추위가 몰아치고, 강풍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낮다. 추운 날 두툼한 잠바 하나 꺼내어 입고, 머플러 목에 두르니 칼바람도 두렵지 않다.
가슴 털이 여기저기 뜯겨 나가 흉하고 끔찍해 눈길을 돌리게 하는 오리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본다. 누가 오리에게 무슨 짓을 하였길래 저리도 흉하고 불쌍한 모습인가. 어느 기자가 몸소 체험해 보고 깨달은 것을 알리려고 쓴 기사 중 한 장면이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고,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가지게 하려는 의도로 찾아서 올린 사진이라고 한다. 오리 가슴에서 뜯겨 나간 가슴 털이 ‘덕다운’으로 오리털 패딩이 된다. 날씨가 추운 날 손쉽게 꺼내어 입는 패딩은 그냥 나의 옷 중 하나다. 패딩을 따스한 옷으로 여겨 추운 겨울 지내기에 적합하다고만 여긴 나의 무신경이 부끄럽다. 옷의 기능만 생각한 단순함을 깨우치고 그 진실에 눈 뜨게 하려는 기자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내가 누리는 따스함이 당연한 게 아니다.
기자가 오리털 패딩 하나를 뜯어 옷 속의 털을 모두 꺼내 놓은 사진이 보인다. 옷에서 나온 오리털이 하얀 눈 수북이 쌓인 겨울 산과 같다. 털의 양이 많아도 너무 많고, 오리 솜털이 솜처럼 가볍고 부드러워 보인다. 오리털 패딩 한 벌에 열다섯 마리부터 스물다섯 마리의 털이 들어간다고 한다. 옷 하나에 이렇게 많은 오리털이 들어가다니. 솜털을 얻기 위해 살아 있는 오리에게서 강제로 뽑아낸다는 사실이 소름 돋는다. 산 사람을 위해 오리 가슴 털이 뽑혀 나가는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날카로운 모서리나 가시에 손끝이 찔리거나 긁히기만 해도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통증으로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한다. 가슴팍의 연한 털이 뜯겨 나갈 때 아파서 지르는 비명을 상상만 해도 온몸이 몸서리쳐진다.
패딩 속 성분 표시를 솜털 대 깃털로 나타낸다. 패딩마다 비율이 다르고, 솜털이 깃털보다 비율이 높을수록 따듯하고 가격이 비싸다. 솜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솜털이 많이 필요한 이유다. 가슴 솜털을 얻기 위해 살아있는 오리를 끌어안아 목을 움켜쥐고 털을 강제로 뽑아낸다고 하니 얼마나 잔인한가. 털을 뽑아내는 것을 육 주마다 반복하고, 적게는 5번에서 15번까지 반복해서 솜털이 뽑히는 고통을 겪은 뒤라야 고통 속 오리 삶이 끝이 난다고 한다. 생 털이 뜯겨 나간 가슴팍 피부가 찢어지고, 상처가 뻘겋다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반복된다고 한다. 살아있는 채로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생 털이 뽑혀 나갈 때의 그 고통은 얼마나 클 것이며, 토해내는 비명 또한 얼마나 절박하고 처절할까. 내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혀 나간다고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진다. 산 사람을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오리가 제물이 되어야 할까.
홈쇼핑 채널마다 겨울 추위를 대비하여 다양한 색상과 색다른 스타일의 패딩을 소개한다. 다 같은 패딩이건만, 작년 패딩과 조금 다른 스타일, 다른 색상으로 소비자의 눈과 귀를 현혹한다. 멋진 모델 뺨치는 쇼핑호스트의 옷 입은 맵시에 끌리고, 달콤한 말에 팔랑귀가 팔랑댄다. 성분 비율과 길이가 다르고, 색상이 다른 패딩 몇 벌이 옷장에 걸려 있지 않은가. 습관처럼 TV 앞에 앉아 홈쇼핑의 포로가 되어, 충동구매를 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생각 없이 지름신에게 휘둘리는 어리석음을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 합리화시키는 우를 또 얼마나 많이 범했는가. 그동안 내가 누린 겨울의 호사가 무수히 많은 생명의 고통과 비명을 바탕으로 한 씨줄과 날줄의 직조로 생겨났음을 어찌할까. 내가 가진 많은 패딩을 버린다고, 안 입는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소유한 것을 어찌해야 할까.
생명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삶이 유지된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제물이 되기 위해 태어난 생명은 없다. 많은 오리 희생과 고통 뒤에 패딩은 달랑 한 벌이 된다고 한다. 산 사람을 위해 다른 생명이 얼마나 더 산 제물이 되어야 할까. 생명이 더 귀하고 덜 귀한 게 따로 있지 않은데 말이다. 오리 가슴에 뭉텅이로 털이 뽑혀 나가 살갗이 시뻘겋고 피멍이 든 게 내 살갗인 양 아프고 쓰리다. 추운 겨울 패딩 잠바를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의 꿈에 털이 없는 오리들이 울면서 무리 지어 뒤따라와 놀라 꿈에서 깨어나는 동화를 읽은 기억이 난다. 오늘 밤 나의 잠자리가 편할 수 있을까.
50여 년 전 올해의 북극 한파로 서해 바닷물이 언 것처럼, 그 당시 바닷물이 겨울이면 으레 어는 줄 안다. 매서운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드는 추운 겨울에 맨 교복으로 학교 가는 길이, 가 본 적 없는 시베리아 추위보다 더 춥다고 여긴 등굣길이다. 교복 위에 걸쳐 입을 코트가 없으니 맨 교복으로 동장군과 맞서 싸워야 한다. 칼바람이 얇은 교복을 바늘처럼 뚫고 들어와 송곳 되어 살갗을 찌르니 춥다 못하여 시리고 아프다. 이듬해, 이웃집 언니가 물려 준 낡은 코트가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복이요, 교복 위 교복으로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복이다. 낡은 코트 한 벌이 준 행복하고 따스한 겨울을 보낸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추위를 많이 타서 추우면 온몸이 사족을 못 쓰고 몸과 마음이 움츠러든다. 철 따라 갈아입을 많은 옷으로도 만족 모르는 가엾은 팔랑귀 카멜레온이다. 정녕 개구리 올챙이 적을 모르는가.
패딩 외 침구류에서도 오리털 제품이 제법 있다. 원재료는 알지만, 그 공급 과정을 생각해 본 적이 그닥 없다. 패딩에 대한 체헐리즘 기사를 본 뒤 눈을 뜨다니, 무심함과 무신경에 개탄한다. 수많은 오리가 겪었을 고통에 눈감고, 비명에 두 귀 막아 알고도 모른 체한 건지 모른다. 나 혼자 발버둥을 친들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을 대세에 실어 합리화시켜 마음 편하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자는 나 한 사람의 독자일망정 의도대로 무신경함에 강한 충격을 주었으니, 기획이 성공한 것이다. 추운 겨울에 패딩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오리털을 대신할 새로운 충전재도 있고, 새로운 충전재로 만든 착한 패딩도 있다고 한다.
세상 만물은 존재할 뿐이다.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힘의 논리로 균형을 이룬다면 언젠가 한쪽이 기우는 날이 온다. 더 따스함을 찾는 패딩 욕심이 지금의 ‘코로나 19’ 팬데믹을 불러온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산 사람을 위해 수많은 생명이 산 제물이 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