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의 체계와 원리를 깊이 이해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디자이너가 어떻게 돈을 벌고 일하며, 창작물을 어떻게 보호하고, 경력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선배들에게 질문을 해도 명확한 답을 얻기 어려웠다. 디자인에 대한 호기심과 창의성은 중요하다고들 했지만, 정작 일의 구조나 계약 조건, 업무 환경에 관해 묻는 것은 금기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5쪽
디자인 관련 법률을 다룬다고 하면 생소한 협상법이나 계약법을 알리는 것보다는 강의료가 높은 대기업을 대상으로 ‘저작권 보호 가이드’ ‘디자인 권리 보호 노하우’ ‘지식재산권 보호 전략’ 등을 강의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디자인 산업계에 맞는 계약과 협상을 교육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4쪽
프리랜서라는 점에서만 살펴보면,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임금 체불’ 사건으로 ‘노동청’에 신고할 수 없다. 프리랜서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가 아니라 용역계약을 체결한 공급자이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받지 못한 돈은 ‘임금’이 아니라 ‘보수’고, 이에 대한 법적 절차의 무대는 노동청이 아니라 ‘법원’이다. 그런데 아무리 계약서의 제목이 ‘용역’이나 ‘위탁’으로 기재되어 있어도 실질적으로 근로계약에 해당할 여지가 없는지는 좀 더 궁리해 보아야 한다. 이때 계약이 어떻게 체결되었는지, 사용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일했는지, 대가로 받은 돈의 성격은 어떠한지를 살핀다.
51쪽
회사가 지켜야 할 임금 관리의 원칙은 단순하다. 법령이나 계약에 따라서 지급해야 할 돈이라면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 법령상 규정된 임금은 기본 임금 외에도 근무 수당, 연차 수당, 퇴직금 등이 포함된다. 근로계약이나 취업규칙에서 정한 상여금이나 직책수당과 같은 약정 수당도 임금에 포함된다.
76쪽
용역계약은 업무 수행의 효율성을 위한 엄격한 관리 감독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과도한 권위적 통제는 계약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제한할 수 있으며, 이는 권력 관계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존중과 이해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106쪽
가끔 대가 금액이 터무니없이 낮은 금액, 혹은 높은 금액으로 설정된 케이스를 보고 왜 그렇게 됐는지 물으면 “예전에 그랬기 때문에”라는 답이 돌아오기도 한다. 최종적으로는 우수한 디자인을 얻는 것이 목표겠지만, 결과물만큼 중요한 것이 대가 금액이다. 대가 금액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양측 모두 불만이 없고, 디자인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
124쪽
“이 작업을 하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나 “이번 작품에 참여하면 이력서에 도움이 될 것이다.”와 같은 말은 창작 분야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겉보기에 고무적인 말들 뒤에는 종종 “제 이름도 크레딧에 포함되나요?” “이 일을 이력서에 어떻게 기술할 수 있나요?” “제가 받게 될 보수는 얼마인가요?”와 같은 실질적이고 중요한 질문들이 숨어 있다.
201쪽
동업계약을 작성하기 전에는 당사자 간의 원활한 소통이 필수적이다. 동업 초기에 과도하게 낙관적인 전망을 강조하면 문제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반대로 현실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면 동업 진행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분쟁을 관찰하며 알게 된 것은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것이다. 계약 전에 서로의 진심을 숨기다가 나중에 갈등이 생기면 상황이 매우 복잡해진다. 문제가 될 징후가 보이면 아예 동업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
219쪽
반면 플랫폼 시장은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로 머리를 싸맬 필요가 없다.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상대로 아이템을 판매하며 플랫폼과 약정한 비율대로 수익을 분배하면 된다. 플랫폼 시장은 팔리거나 아니거나 하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원리를 따른다. 디자이너는 크리에이터이자 사업가로서 아이템을 팔고 수익을 분배받는다. 캐릭터, 이모티콘, 동영상, 공예품, 발표자료, 경험과 노하우, 그 모든 것이 콘텐츠이자 거래 대상이다.
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