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나는 앞날만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했던 거야.
현재를 마주 보지 않아서.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몰라서.
“흩뿌려진 슬픔들을 원사 삼아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정교하게 직조해 낸 동아시아 SF.”
스파이라가 올해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으로 허블에서 출간되었다. 천선란, 청예 등 현재 활발히 활동하며 또렷한 성취를 일구고 있는 작가를 탄생시킨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이 올해 일곱 번째를 맞아 김아인이라는 걸출한 신인 소설가를 냈다. “‘장편감’에 걸맞은 중량감”(김성중 소설가) “추리 구도를 만들고 낭만적인 서사를 엮어”낸 “완성도 높은 장편소설”(인아영 문학평론가)이라는 찬사를 받은 스파이라의 배경은 에피네프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휩쓴 근미래다. 인간이 죽은 후에도 정신은 전산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소설은 이러한 의문과 설정에서 시작해 팬데믹 상황의 디스토피아이면서도, 기술이 발달하여 제2의 가상 인생 서비스가 제공되는 세계상을 그린다.
소설은 그 정신 전산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AE라는 거대 기업을 둘러싼 인물들의 첨예한 입장 차와 대립을 다룬다. ‘디스토피아 상황에서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은 과연 유토피아일까?’라는 질문에 다각도로 접근한다. 그러면서도 추리 스릴러와 로맨스 서정을 정교하게 가미한 게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AE의 배후를 파헤쳐나가면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스파이라’의 실체에 다가가기까지, 작품은 놀랍도록 세밀한 짜임새와 숨 막히는 몰입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아울러, 작가는 펜데믹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로맨스, 오묘한 불안감, 과거 일상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섬세하고 먹먹한 필치로 그려내며, 아름답고도 유려한 웰메이드 SF 세계를 창조해냈다.
전염병이 창궐한 디스토피아,
기술 발달로 이후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불안 속에서 대치하고 마주하고 흔들리는 사람들
디스토피아 속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은 유토피아일까?
“4억 9572만 5423명의 고객님들이 제2의 삶을….” _24쪽
전염병이 창궐한 세계, 인류의 절반이 죽고 남은 후 5억 명가량의 사람들은 AE라는 기업이자 공간 혹은 서버에 입주해 이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른바 정신 전산화 기술이 개발되어 인간의 기억과 인격이 데이터화될 수 있었던 것. ‘나’인 웨이쉬안은 AE에서 고객의 뇌와 척수를 들어내고 남은 신체인 ‘반송체’를 폐기하는 업무를 한다. 정신이 서버에 연결되려면 수많은 유선 케이블을 연결해야 하므로 뇌와 척수를 적출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다양한 인종이 언어권별로 무리 이뤄 다니는”(25쪽) 하나의 도시나 마찬가지인 AE. 이를 둘러싼 흥미로운 인물들은 서사의 중축이다. 각기 저마다 매력적이고 개성 강한 인물들은 죽음 이후의 새 삶에 대한 저마다의 입장 차를 여실히 드러내며, 실행하고 협력하고 대치하면서 갈등은 확산되기 때문이다.
하라바야시 가스미는 뇌과학 연구원으로 AE의 실질적인 브레인이다. 정신 전산화 기술은 근시안적인 “도피의 길”(68쪽)이라고 비판하면서도, AE가 독점한 기술을 활용해 펜데믹을 타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존재에 대해서는 다소 온건하고 유보적인 입장이다. 반면, 페이는 그 대척점에 있다.
“하지만 수명이 다할 때쯤에는 AE가 주는 가짜 영생을 다시 바라게 될 거야. 현재 삶을 덜 진지하게 바라볼 테고. 그런 게 희망이라면 없는 게 나아.” _206쪽
페이에게 AE의 서비스는 가짜 천국 같은 곳에 목숨을 의탁하는 일이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현실의 삶을 덜 충실하게 살아간다고, AE가 세상을 더 망치고 있다고 페이는 생각하며 비밀스러운 일을 실행에 옮긴다. 한편, 황 신부 세력은 AE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과격한 집단을 대변하며 물리적 폭력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한 기업이 만든 인공적인 천국과 영생은 종교와 배치될 수밖에 없”(89쪽)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AE의 초기 개발자 중 한 명의 인격 데이터인 ‘신’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흥미와 재미를 더한다. 디스토피아 상황에서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은 과연 유토피아일까? 이를 둘러싼 첨예한 논란과 대립은 어떻게 어디까지 이어질까? 스파이라가 구축해 놓은 짜임새 있는 전개와 기막히고 신선한 결말에 독자는 소설 읽기의 생생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추리 스릴러와 로맨스 서정이 만난 정교한 SF
“그 기억들은 좋다고 하기에는 차고 건조했고, 나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형형하고 아름다운 색을 띠고 있었다.”
이 SF소설의 독특한 요소는 추리 스릴러와 로맨스 서정을 조화롭고도 정교하게 가미했다는 점일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사건들이 긴장감 있게 전개”(김희선 소설가)된다는 평과 “흩뿌려진 슬픔들을 원사 삼”(강지희 문학평론가)는 “낭만적인 서사”(인아영 문학평론가)라는 수식이 동시에 붙을 수 있는 이유이다.
“아니, 원해서 온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러 왔다고 해야겠네요.”
“원해서 온 게 아니라면… 끌려온 건가요? 가족분들에게?”
“아뇨. AE에게요.”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_56쪽
스파이라는 AE에 입주하는 일이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강제적인 경우가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서사를 꾸려나간다. 업무하는 도중 웨이쉬안은 그의 연인이었던 페이의 반송체를 발견한다. 너무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욱 납득할 수 없는 건 페이가 정신 전산화 기술을 한사코 거부해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괴이한 영상이 하나 도착한다. “새빨간 입자. 꿈틀거리는 땅. 마지막의 비명 소리.”(61쪽) 소설은 세계를 잠식하다시피 한 AE라는 거대 기업의 배후를 파헤쳐나가는 구조를 띠며 종국에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스파이라’의 실체를 향해 다가가는데,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완성도 덕에 훌륭한 추리 미스터리 장르를 읽는 기쁨 역시 선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릴러적 요소도 두드러진다. AE에 강제 입주되었다고 의심되는 또 다른 인물인 유즈키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보관소’와 황 신부 세력의 근거지인 ‘기도원’, 황 신부 세력과 극렬히 대치하는 공간인 ‘호텔 로비’ 등 로케이션을 옮겨 가며, 추적하고 찾아내고 도착하여 대치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돌아오는, 다시 붙잡히고 도망치는 일련의 흥미로운 서스펜스적 상황과 일촉즉발의 숨 막히는 전개는 소설에 긴장감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 기억들은 좋다고 하기에는 차고 건조했고, 나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형형하고 아름다운 색을 띠고 있었다.” _72쪽
그럼에도 스파이라는 시종일관 노스탤지어가 풍기는 어떤 낭만적 분위기로 가득하다. 웨이쉬안과 페이, 그리고 하라바야시 가스미와의 관계에서 “사랑을 잃고 다시 사랑하게 되는 로맨스”(강지희 문학평론가)를 읽어내며 어렴풋한 감정의 뒤척임을 감각할 수도, 디스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적실하게 잘 형상화된 불안을 체감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에 매혹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것은 전염병에 휩싸이기 전 일상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그러니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생활과 삶의 한 층계들”(72쪽). 소설은 “아주 먼 우주에서 부유하며 지구를 내려다보는 기분”(73쪽)으로 현재보다 온전했던 세계의 과거를 서술한다. 여기에는 어떤 먹먹한 서정이 자리하는데, 웨이쉬안과 페이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홍콩에서의 장면들을 묘사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그러하다. 세계가 파탄 나기 전, 그때는 모르고 누렸던 평온한 세계를 충분히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그 세계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넌지시 일러주는 것만으로도 스파이라는 지금의 우리에게 주요한 메시지를 환기한다. 짜임새와 흡입력뿐 아니라 서정적이고 아련한 누아르와 로맨스의 감각…. 스파이라 우리가 읽고 느낄 만한 거리로 가득하다. 아름답고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이 동아시아 SF를, 김아인의 첫 소설 세계를 독자에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