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이자
다정한 정원가, 유쾌한 반려인
카렐 차페크 산문의 새로운 여정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 출신의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카렐 차페크. 차페크가 영국과 스페인을 여행하며 노트에 꾹꾹 눌러쓴 에세이와 직접 그린 사랑스럽고 창의적인 일러스트를 수록한 《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조금 미친 사람들−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를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다.
차페크는 아무 데나 펴놓고 읽어도 삶의 근사한 비밀을 일러주는 소설 《평범한 인생》과 ‘로봇’이란 말을 탄생시킨 희곡 《R. U. R.》, 가드닝 분야의 고전이 된 에세이 《정원가의 열두 달》, 미워할 수 없는 개와 고양이에 대한 에세이 《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등을 통해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독보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소설과 희곡에서는 주로 미래에 대한 비판이나 철학적인 성찰을 담은 반면, 에세이에서는 키득키득 웃게 만드는 유머와 영화처럼 펼쳐지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과 번뜩이는 통찰을 전달한다. 특히 영국과 스페인이라는 미지의(차페크는 영국 땅에 발을 내딛고서야 자신이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라를 경험하며 남긴 여행기 속에 풍자와 유머, 동물과 자연, 인간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았다. 국내에 처음 번역된 이 두 권의 여행기는 다채롭고 위트 있는 차페크 산문의 매력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게 해준다.
때때로 우리에게 잘못된 일이 생길 때마다
한 걸음 더 스페인 쪽으로
《조금 미친 사람들》은 화가, 건축가, 만틸라를 걸친 여인, 플라멩코를 추는 집시, 광란의 투우사, 경이로운 구두닦이 등 열정적이고 어딘가 조금 미쳐 있는 듯한 스페인 사람들을 따르는 여행기다. 차페크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닌 이웃 주민의 시각으로 스페인을 바라보았다. 특히 플라멩코나 투우 같은 스페인 고유의 문화를 각별히 존중했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발을 부딪치는 딱딱 소리가 들릴 것처럼 플라멩코 댄서들의 움직임을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그려냈고, “책에서조차 죽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에 조금의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차페크답게 투우가 주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황소의 목에 창을 꽂아 넣는 투우장의 풍경은 분명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만, 모래 위로 엉키는 수많은 관중의 함성과 감정을 세밀하고 속도감 있는 언어로 풀어내는 솜씨는 그가 왜 세계적인 작가인지 단번에 증명해준다.
바로 그 순간 안달루시아 기수는 이미 말을 돌려 버터 덩어리에 나이프를 꽂듯 황소의 목에 창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관중이 일어나 환호했다. 그리고 책에서조차 죽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에 조금의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죽음이 농담도 구경거리도 아니라고 여기는 나는 목에 무언가가 걸린 것 같았다. 물론 이는 공포의 결과였지만, 감탄도 포함하는 것이었다.(133∼134쪽)
차페크에게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다른 문화와의 진정한 만남을 의미했다. 이는 오늘날 SNS에서 누가 더 화려한지, 누가 더 좋은 것을 가졌는지, 얼마나 많은 곳을 가고 맛난 음식을 먹었는지를 자랑하고, 다양한 포즈를 뽐내며 ‘좋아요’를 수집하는 자극적인 여행과는 사뭇 달라 한층 인상적이다. 벨라스케스, 리베라와 함께 스페인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무리요가 그린 소년들은 전 세계 박물관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지만, 차페크는 박물관 대신 땀 흘리는 광장과 산책로에서 이 소년들을 발견해낸다. 비록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그들에게 동전을 갈취당할지라도 무리요가 만난 소년들의 얼굴이 바로 이들과 가장 닮아 있음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차페크에게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리야말로 가장 좋은 박물관”이었다. “당나귀가 귀를 뒤로 바짝 붙여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비좁은 골목이나 “허름한 벽과 창살 달린 창문 사이로” 설핏 비치는 하늘이나 “자수를 놓거나 금으로 세공하거나 보석을 박는 등 모든 방식으로 미친 듯이” 장식한 교회들을 지나치다보면 박물관에서만큼이나 걸음을 자주 멈출 수밖에 없음을 유쾌하게 드러낸다. 나아가 “알라신의 격렬한 글씨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잉카의 황금, 다양한 시대와 신들, 문명과 인종들의 삶”이 엉킴 없이 조화를 이루는 광경을 마주할 때면 “꿈속을 걷듯이” 스페인 땅을 거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조금 들뜬 목소리로 확신한다.
당신은 포도주나 기름을 실은 당나귀를 피해 가며, 창문의 아름다운 하렘 창살을 훔쳐보고 꿈속을 걷듯이 걸어간다. 꿈속을 걷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일곱 걸음마다 멈춰 서게 될 것이다.(33∼34쪽)
차페크와 함께 관능적이고 매력적이며 아늑하고 다정한 세비야 거리를 걷고, 곳곳에 무어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알카사르 정원을 방문하고, 만틸라를 두른 까만 눈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다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가 스페인을 꿈꿔왔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조금 미친 사람들》은 웃고 춤추고 채색하고 사유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여행기이자 녹아내릴 듯 강렬한 매력의 스페인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만드는 책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가닿을 수 없는
아름답고 숭고한 모험의 땅
거리는 그저 지나가는 곳이어서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 영국인들과 다르게 스페인 사람들은 삶의 매 순간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스페인의 거리는 “포도주로 가득 찬 술잔처럼 생기 넘치”고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다. 스페인에 발을 내디딘 순간 이 사실을 깨달은 차페크는 거리와 광장, 골목과 정원에서 끊임없이 스페인을 마주한다. 태국의 전통 춤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는 동작으로 신발을 문지르는 구두닦이부터 캔버스 밖에서 살아 움직이는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인물들, 자정에야 문을 여는 극장과 새벽 2시에도 북적이는 댄스홀, 가우디처럼 “열정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끌어올린 기발한” 도시의 건축가들까지 자신의 삶과 열정을 막다른 길로 내몰길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을 만난다. 차페크는 이들의 생활에 찬찬히 녹아들어 “눈이 자신의 비전에 열정적으로 고정된 사람은 모두 조금 미친다”라는 자명한 삶의 진실에까지 가닿는다. 미치지 않고서야 온전히 세계를 살아내기 힘든 우리의 시선이 스페인에 자꾸 머무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