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도의 기온 변동이 빚어낸 한반도인 이합집산의 대역사
서울대 지리학과 박정재 교수의 한반도 빅히스토리
한국인은 누구이고 어디서 왔을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던져봤을 질문이만 근거가 부족했기에 지금까지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고유전학의 발전 덕분에 아프리카에서 탈출한 사피엔스가 어떤 경로로 한반도에 이르게 되었는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고, 고기후학의 데이터들은 사피엔스가 어째서 정주가 아닌 이주를 했는지 합리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서울대 지리학과의 박정재 교수가 여기에 고고학과 역사학, 언어학까지, 점점이 흩어져 있던 데이터를 하나로 엮어 지금까지 누구도 들려주지 않았던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담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무엇보다 한반도가 추워진 8.2ka 이벤트, 중기 청동기 저온기, 3.2ka 이벤트, 중세 저온기, 철기 저온기에 북방에서 내려온 기후 난민이 섞여 한국인의 주류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의 사피엔스는 어떻게 한국인이 되었을까?
기후학, 고유전학, 고고학, 언어학을 통섭해 추적한 한국인 형성사
서울대학교 지리학과의 박정재 교수가 고유전학, 기후학, 고고학, 언어학 등 점점이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통합해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근거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까지 한국인은 북방계의 영향을 받아 몽골인과 유사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고유전체 연구는 한국인에 영향을 준 북방계가 알타이산맥이나 바이칼 호수 주변이 아닌 남방계와 마찬가지로 남쪽에서 기원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실제 유전적으로 한국인은 몽골인과 꽤 차이가 나며 오히려 중국 북동부 사람이나 일본인과 가깝다. 고유전체 연구의 발전으로 막연한 추론에 그쳤던 한국인의 형성 과정을 이제야 제대로 추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한국인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데는 고유전체 데이터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모든 시기를 촘촘히 채울 만큼 고유전체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고유전체만으로 왜 인류가 정주 대신 이동을 택했고 찬란했던 문명이 기울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유전체 및 고고학 자료와 함께 고기후 데이터를 고려해야 사피엔스가 왜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동했는지, 그리고 과거 동북아 지역민이 왜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이동했는지 전체적인 양상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과거 대부분의 문명이 흥하고 쇠할 때 기후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고해상도의 고기후 자료가 많이 생산되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이제 우리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이다.
지리학자 박정재 교수는 여기에 고고학, 역사학, 언어학의 연구들을 통합해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사피엔스의 이동을 추적한다. 문명의 흥망성쇠의 보편적인 양상 속에서 동아시아의 인류 이동사와 과거 기후 변화를 함께 짚으며 한국인의 형성 과정을 추적했다. 1부에서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나간 후 지역별로 집단이 조성된 과정들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2만 5000년 전에 시작된 마지막 빙기 최성기부터 지금까지 북반구에서 기후 변화의 성격과 이것이 유라시아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본다.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하는 3부와 4부에서는 북방의 수렵채집민 집단과 농경민 집단이 기후 변화를 피해 언제, 어떻게 한반도로 남하해 지금의 한국인을 형성했는지 다룬다. 5부에서는 앞의 내용을 종합하고 온난화 시대 한국인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추위를 피해 남하한 기후 난민, 한국인의 뿌리가 되다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있어 핵심 키워드는 ‘기후 난민’이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이동한 호모 사피엔스는 대략 4만 년 전에 동아시아에 도착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반도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가장자리에 있고 대부분이 산지여서 먹거리를 구하기 유리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어 있던 땅으로 사람들을 이끈 건 기후 변화가 야기한 기온 하강이었다. 2만 5000년 전 마지막 빙기 최성기의 극심한 추위가 찾아왔을 때, 온화한 홀로세 기후 속에서 8200년 전 갑작스럽게 한랭화가 찾아왔을 때, 홀로세 후반기 적도 서태평양 해수면 온도와 태양 흑점 수의 변화로 주기적으로 건조 한랭기가 찾아왔을 때, 북방민은 자신의 터전을 떠나 한반도를 찾았다. 저자는 여러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들이 언제 한반도로 진입했고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추적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랴오허 문명의 중심인 훙산 문화나 샤자뎬 문화를 일궜던 고대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현대인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다. 고인골 DNA 자료는 한족보다 한반도인이 랴오허 문명의 주축이었음을 암시한다. 동북아 지역이 한랭 건조해지는 5000년 전 이후 북방민, 특히 랴오시와 랴오둥 지역 사람들은 농경에 좀 더 적합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로 꾸준히 내려왔고 그중 일부는 일본으로까지 건너갔다. 이처럼 추위를 피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기후 난민의 유입은 한국인의 형성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흔적은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북방민이 남하할 때마다 한반도 사회는 갈등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들이 가져온 선진 문화는 순기능을 했다. 중기 청동기 저온기에는 벼 농경 문화가, 철기 저온기에는 동검 문화와 원시 한국어가, 중세 저온기에는 철기 기마 문화가 처음 한반도 남부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들은 한반도의 사회가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춰 나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저자는 기후 변화는 유전자뿐 아니라 문화도 뒤섞으며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한반도 최초 벼 농경 송국리 문화의 주인공은?
한국 청동기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문화이자 한반도 최초의 벼 농경 집단이라 부르는 송국리 문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한반도에 최초로 벼 농경을 전한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수도작 문화가 한반도로 전파된 시기나 과정은 불분명하다. 하지만 기후가 악화될 때마다 북방 사회가 갈등에 휩싸이고 이주가 이어지면서 선진 문물이 한반도로 전달되었을 개연성을 고려할 때, 저자는 샤자뎬 하층문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한다.
랴오허 유역에 자리했으며 황허강 유역의 룽산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진정한 농경 사회인 샤자뎬 하층문화는 약 3400년 전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는 이들 지역의 주거지 수 증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으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던 와중 들이 닥친 500년 주기의 3200년 전의 추위는 그 어느 때와 달랐다. 급격한 추위와 더불어 서쪽과 북쪽 지역의 사람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랴오허 유역으로 모여들었다. 샤자뎬 하층문화 사람들은 물리적 갈등을 피해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긍강 중하류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노련한 솜씨로 논을 조성해 곧 쌀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바로 이들이 바로 우리 학계에서 한반도 최초의 벼 농경 집단이라 부르는 송국리 문화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한다.
물론 산둥의 벼 농경민이 랴오둥을 거치지 않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직접 들어왔을 가능성이나 북에서 진입한 농경민이 남하하면서 점진적으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며 송국리 문화가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웠던 추위가 닥쳤던 3200년 전 랴오허 유역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서는 주거지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는 점을 보면 북방의 이주민이 대거 한반도로 유입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3200년 전의 추위는 랴오허와 한반도뿐 아니라 지중해 동부에도 영향을 줄 만큼 영향력이 컸다.
가야인에게 조몬인의 DNA가?!
2022년 6월 울산과학기술원 연구팀이 포함된 국제 연구진이 가야 대성동 고분과 김해 유하 패총에서 발굴된 인골의 DNA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 주인공은 기원후 300~500년 사이에 묻힌 가야인으로 총 22명이었다. 이들의 DNA 분석 결과는 흥미로웠다. 예상보다 조몬인의 DNA 비율이 매우 높게 나온 것이다. 이 결과는 오랫동안 한반도의 남해안과 일본에 살던 집단 사이에 빈번한 왕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게 한다.
보통 현대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일본인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국인과 유전적 근연성이 가장 높은 현대인은 북중국인이다. 현대 한국인에게는 조몬인의 유전 성분이 거의 없지만 일본인에게는 조몬인의 유전자가 유전체의 1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인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조몬인의 흔적, 가야인들에게 나타난 높은 조몬인의 DNA 비율. 일본인은 과연 한국인의 기원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까?
기존까지 일본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하니하라 가즈로의 이중 구조 가설이 인정을 받아왔다. 1만 6000년 전부터 일본 열도에서 거주한 조몬 수렵채집민과 3000년 전 이후 한반도에서 넘어온 벼 농경민이 결합해 지금의 일본인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일본인의 고DNA 자료를 바탕으로 가즈로의 이중 구조 가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실제 일본인의 고DNA 자료를 확인해 보면 랴오둥, 한반도 북부에서 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내려왔고 2800년 전과 기원 전후로 이들 중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걸 알 수 있다. 현대 일본인은 이중 구조가 아니라 삼중 구조로 형성된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 랴오시나 랴오둥에서 기원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진입한 사람들이기에 유전적으로 치아가 크지 않다. 그렇지만 야요이 시대의 도래인은 상대적으로 중국 동북부 집단의 DNA 비중이 높고, 고훈 시대의 도래인은 중국 황허강 집단의 DNA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온다. 저자는 이와 같은 유전 구성의 원인을 위만조선에서 찾는다.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망하고 그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의 삼한으로 펴진 뒤 약 3세기부터 기후 변화나 전쟁 등으로 사회가 혼란해질 때마다 많은 난만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들이 일본의 고훈 시대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야요이 시대와 고훈 시대를 거치며 점차 조몬인의 유전자 비율이 줄어들었다. 현대 일본인은 야마토 시대의 사람과 거의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고조선과 한국어의 기원
이렇듯 현대 일본인을 이루는 주요 유전 구성이 랴오시나 랴오둥에서 기원했다면, 또 조몬인의 유전 비율만 빼면 현대 한국인과 유전 프로필이 거의 유사하다면, 어째서 이 둘은 서로 소통할 수 없을 정도로 언어가 다른 것일까?
저자는 원시 한국어가 조/기장 농경 문화와 함께 대략 6500년 전에 한반도로 유입되었고, 원시 일본어의 경우 벼 농경 문화와 더불어 3300년 전에 한반도로 전달된 후 송국리 문화인이 약 2800년 전 규슈로 이주할 때 함께 건너갔다고 본 로베이츠의 가설과 2300년 전 랴오허 지역에서 세형동검을 지니고 한반도로 들어온 유목 문화 배경의 집단과 관련이 있다는 휘트먼의 가설을 비교 검토한다.
로베이츠의 가설에 따르면 원시 한국어와 일본어의 차이는 랴오허 지역에 남아 있던 농경민과 한반도로 유입된 농경민 사이의 3000년 동안의 공간적 격리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3300년 전 유입된 농경민들이 기존에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과 문화적 교류 없이 언어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을까? 저자는 이주의 규모와 정도로 볼 때 그와 같은 주장은 성립하기 힘들다고 본다.
저자는 원시 한국어가 2300년 전 랴오허 지역에서 세형동검을 지니고 한반도로 들어온 유목 문화 배경의 집단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휘트먼의 가설을 샤자뎬 상층문화에 포함되며 고조선과의 관계 때문에 자주 언급되는 랴오시의 십이대영자 집단을 이와 연결한다. 혹독한 기후로 한반도에서 송국리 문화가 크게 쇠락하던 2300년 전, 십이대영자 집단 또한 기후 변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국 시대의 연나라가 명장 진개를 앞세워 압박해 들어왔다. 사람들은 기후 변화와 전쟁을 피해 랴오허강을 건넜고, 랴오둥에 있던 고조선 사회는 외부인의 유입으로 혼돈에 빠져들었다. 이어 진개는 랴오둥으로 진격하여 이미 세력이 약해진 고조선을 공격했고 고조선인들은 한반도 서북부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한반도에 세형동검과 같은 유물을 남긴 주인공들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해안을 따라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점토대토기 집단도 있었다. 저자는 아마도 이들이 원시 한국어를 썼던 무리였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두 가설 모두 지금의 한국어와 일본어가 어째서 이렇게도 다른지 설명을 한다는 점, 그리고 휘트먼의 가설에 근거한 2300년 전 기원설 역시 기원 전후로 넘어가 야마토 시대를 이끈 도래인이 원시 한국어를 썼을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역으로 한국인의 기원을 밝히는 데 앞으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뜨거워지는 한반도, 한국인의 2100년 시나리오
지금의 우리를 이룬 우리의 조상은 과거에 한랭한 기후 조건을 이겨내고자 이주를 택해왔다. 하지만 인류세에 접어들면서 이제 우리는 온난화를 상대해야 한다. 온난화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다가온 현재로 이제 모두가 체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온난화에 발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해 정말로 초간빙기 시대를 맞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리나라 기상청 시나리오 SSP3-7.0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 대비 2100년까지 전 지구 평균 기온이 4.3°C가 오를 때 한반도는 5.9°C, 남한 지역은 5.4°C가 오른다. 다시 말해 지금보다 3.8°C가 상승한다면, 서울 평균 기온(현재 12.8°C)은 16.6°C가 되어 서귀포의 기온과 비슷해지고 부산 평균 기온(현재 15°C)은 18.8°C가 되어 중국 푸젠성 지역의 기온과 비슷해진다. 지구 온난화는 기온 상승 자체보다 그에 따라 늘어나는 기상 이변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다. 여름철의 폭염, 겨울철의 가뭄과 산불, 작물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 해수면 상승, 태풍의 강화, 갑작스러운 폭우 등 위와 같이 기온이 빠르게 오른다면 수많은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이 한반도의 온난화 시나리오를 점검하면서 온난화의 관점에서 국내외 시스템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부적으로는 종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출산률 증가 및 외국인의 유입, 외부적으로는 북쪽의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확립하는 등 한반도인의 존립을 위해서는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극심한 기후 변화는 늘 기후 난민을 야기했고, 이는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