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이나 연출을 대단히 특별한 일로 생각할 것 없다. 모든 계획이 곧 기획이자, 기획의 구체화가 곧 연출이다. 우리는 이미 삶에서 매일 기획하고, 연출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기획자이자 연출가다. 그리고 기왕이면 나의 기획과 연출이 나와 남들에게 새롭고 신선하게, 재미있고 멋지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 〈나만의 방법을 찾아서〉 중에서
모든 서사가 힘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서사는 크든 작든 힘을 갖는다. 사진, 그림, 노래, 영화, 공연 등 그럴듯한 작품에는 반드시 그럴듯한 서사가 있다. 서사가 있다면 한 장의 사진, 한 폭의 그림에서 대하소설이나 10부작 드라마, 장편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서사의 힘은 이상을 현실로 느끼게 해주고 현실을 이상 세계로 인도한다. 설화를 만들고 전설이 된다.
- 〈이야기를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중에서
‘참신’은 ‘새로움을 베어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때 훨씬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새로움이란 언제나 과거의 유산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새롭다고 할 때 그것은 과거의 무엇으로부터 새롭다는 것이다. 참신한 기획이란 언제나 전례와 관례에 빚을 진 채 만들어진다. 이전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참신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지 만물의 창조와 진화 등 모든 역사가 그렇다. 기획자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그 무엇 역시 이미 있던 것들에 크게 신세 질 수밖에 없다.
- 〈새로움을 베다〉 중에서
우리 시대 정서는 이전 시대 정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시작과 끝은 맞닿아있고, 끝이 없는 시작도 시작이 없는 끝도 있을 수 없다. 문화·예술도 마찬가지다. 대중음악의 새로움은 비틀스와 마이클 잭슨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문학, 음악 등 모든 장르의 예술 역시 여전히 당대 대중예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분석되고 재해석되며 만들어져왔다. 새로운 생각,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원형을 탐구하는 욕심 많은 고고학자가 되어야 하고, 그것을 조합할 줄 아는 뛰어난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
- 〈고고학자가 되거나 연금술사가 되자〉 중에서
창의적인 일에 대한 깊은 오해가 있다. ‘대중의 기호와 시대의 요구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지, 자기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뭐가 어려워’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정확히 반대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등져야 한다. 차라리 남들에게 맞추며 사는 게 여러모로 쉽고 안전한 법이다. 창의적인 일을 할 때 시대, 대중, 클라이언트 요구대로 하는 게 내 뜻대로 하는 것보다 한결 쉽다. 남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관록과 기술로 충분히 가능하다.
- 〈원하는 대로, 꾸준하게〉 중에서
기존의 것, 이미 존재하는 것, 지금 가지고 있는 무엇에 새로움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 그래야만 한계에 다다른 나의 과제가 놀랍게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상상력은 정확히 반대다. 아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질주해야만 한다. 상상력의 본질은 근본, 원인, 핵심만 남기는 일이다. 거기서부터다. 보태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 〈오리지널의 뼈〉 중에서
올림픽 전야제에서부터 국민과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어떤 행사라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주목하도록 해야 하는 순간과 관객이나 참석자가 각자 상념에 빠져들도록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행사장에 앉은 사람을 내내 주목하게 만들 수도 없다.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무리하게 억지로 주목을 끌려다 보니 과한 무대가 만들어지고, 쓸데없이 흥분한 사회자가 등장하고, 관객들에게 밑도 끝도 없는 리액션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하게 또는 흐릿하게〉 중에서
텍스트는 각자의 해석을 존중해주는 미덕이 있는 기법이지만, 이미지는 누군가 해석을 선점했을 때 그것으로 몰려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텍스트의 경우 수용자의 해석에 따라 다양성이 어느 정도 인정되지만, 이미지는 누구든 먼저 해석하고 공표해버리면 수용자 각각의 감상보다는 선도적인 해석이 더 먹히게 된다. 이미지가 좀 더 설득하기 쉬운 방법이다. 이 점을 이해하면 행사나 이벤트에서 언제 영상을 활용하고 어떤 이미지를 어떻게 노출할 것인지, 자막은 어느 시점에 들어가야 효과적인지, 스피치와 멘트가 들어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가 분명해진다. 이른바 제작 문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 〈글과 그림〉 중에서
딱 들어맞는 장소를 찾으려면 우선 해야 하는 것이 있다. 행사 규모, 프로그램, 세밀한 연출 기법보다 먼저 주제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그 장소에 서면 무엇을 연상할 수 있는지가 먼저다. 그 장소에 직접 앉아 행사를 지켜볼 사람들은 물론 중계방송이나 영상을 통해 보게 될 사람들까지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 〈장소가 전부다〉 중에서
나는 행사를 연출할 때 솔로 곡이나 무반주를 선호하는 편이다. 국기를 게양한다거나 묵념을 할 때 트럼펫 솔로를 연주하면 이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애국가가 훨씬 웅장해진다. 어떤 노래의 도입부를 일부러 무반주로 연주하도록 편곡하는 것, 가벼운 이야기 뒤에 무거운 주제를 배치하고 슬픈 대목 뒤에 웃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붙이는 것도 극단적 변화를 통해 감정의 대비를 높이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성공적으로 반복되면 보는 사람들은 무대에 집중하게 되고 어
느 순간부터 동화된다.
-〈빛과 어둠〉 중에서
연출을 작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단정 짓는 경우가 많고, 연출가 역시 무언가를 꾸며내는 사람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출가의 연演은 ‘흐르다’, ‘통하다’라는 뜻이 있다. 연출은 ‘direction(방향)’, 연출가는 ‘director’다. 그 어디에도 꾸민다거나 만들어낸다는 의미는 없다. 나는 연출가를 ‘그가 꿈꾸는 세계관으로 관객을 흐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연출이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