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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로 솟은 서릿발의 행렬이 사라지는 곳엔 입춘을 맞이한 이나바(因幡)의 오색 절경이 펼쳐지는 지대가 드리운다. 그러나 입춘을 맞이하였다고는 하여도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칼바람은 여전히 날이 선 기색을 내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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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는 어딘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땅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꿉꿉한 냄새도,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결에 얹힌 물비린내도, 칠야처럼 해가 완전히 기운 듯 하늘에 펼쳐지는 먹빛과 하늘이 거대 먹구름에 잡아먹힌 듯 펼쳐지는 잿빛도, 우산에 머리가 가려져 모두가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느껴지는 것도, 음습한 날씨에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듯이 보이는 건물들도, 이 모든 게 내겐 불안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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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로 거대한 여자가 서 있다. 온 세상이 불타오르는걸, 구경이라도 하듯 여자의 눈은 노랗고 빨갛게 타올랐다. 그 무서운 눈으로 히메코를 내려다본다. 비로 둔갑한 살의는 내 피부 위로 떨어져 온몸으로 스며든다. 감각적으로 돋아나는 두려움에 젖어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기억의 창고 속에 가만히 서 있던 내 등 뒤로 누군가의 부르짖음이 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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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산괴가 히메코를 데려간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그 결론에 도달했다. 궁극적으로 내가 민속학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히메코의 죽음을 그 한 문장으로 단정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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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아이.
언제부터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나로서는 도통 알아차릴 수가 없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는 마을에서도 나는 이상한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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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미치오가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어 어둠 속에서 눈을 부라렸는데 누나가 빠른 속도로 기어다니는 기괴한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이 이후로도 계속해서 미치오를 괴롭히자 결국 미치오를 우리 부부의 방에서 재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당시 아내는 딸아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약간의 신경쇠약을 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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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제등의 빛이 소녀의 동공에 반사된 탓에 소녀의 눈이 아름다운 노란 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어쩐지 고혹적인 풍경입니다. 꿈속의 한 장면으로 등장했더라면 깨어나고 한참 뒤에도 그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그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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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말이에요…….”
미아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고 물건 같아요. 꼭 분위기가 그래요.”
사고 물건……. 화재, 자살, 살인 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건물을 의미한다. 꼭 건물이 아니더라도 교통수단이나 물건 등에 사고 물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지만, 보통은 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흔히들 ‘사연이 있는’이라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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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어디선가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꼭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짤랑, 짤랑······ 짤랑, 짤랑······
방울 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산속 깊은 곳에서 이상야릇한 손짓으로 방울이 묶인 새끼줄을 흔들고 있는 산괴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