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민족주의 연구의 획기적인 이정표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1989년 톈안먼 광장 진압 사건 이후 중국 인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는가? 198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음에도 중국 인민들은 왜 반서구적 민족주의로 전향했는가? 그리고 중국은 왜 미국과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에 있어 점점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가?
왕정 교수는 이 책에서 대중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재교육을 치밀하게 추적하고 분석하면서, 그러한 재교육이 중국을 끊임없이 19세기와 20세기 초 제국주의 세력에 괴롭힘을 당한 ‘100년의 치욕’의 희생자로 묘사해왔음을 밝힌다. 나아가 그는 포스트 톈안먼 시대와 포스트 냉전 시대 중국의 정치적 변화, 인민의 감정, 국제관계 속의 행동방식을 해독하기 위해 역사적 기억을 활용한다.
또한 중국의 굴기에 있어 역사적 기억이 수행한 역할,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한 역사적 기억의 조작, 인민의 상상 속에서 역사적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반응, 주요 강대국들과의 외교관계에 있어 역사적 기억이 중국의 외교정책을 형성·구속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탐색한다.
◆ 내부자의 비판적 시선으로 살펴본 중국 정치의 어제와 오늘
왕정 교수는 베이징 대학 출신으로 중국 정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며,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세턴홀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충돌, 중국의 대외관계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로서 누구보다 중국의 내부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단행한 후 급속도로 경제적‧군사적 성장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다수 서구인이 ‘중국의 굴기’에 초점을 맞출 때, 왕정 교수는 중국의 굴기를 경제적‧군사적 성장 같은 단일 렌즈를 통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중국의 민족적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복합 렌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집필했다(그 결과 이 책은 2013년 국제관계연구회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오랜 역사 속에서 중국인들의 내면세계에 굳건히 자리 잡은 ‘중심 왕국 신드롬’에 더해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짓밟힌 과거 100년을 지칭하는 ‘치욕의 세기’가 오늘날 중국의 정치적 담론과 외교정책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물망국치勿忘國恥’(국치를 잊지 말라)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밝힌다.
“이 책은 중국의 정체성 형성과 정치적 담론에 대해 역사적 기억이 갖는 힘을 탐색한다. 그리고 이 책은 중국의 민족주의와 그 의도, 굴기의 문화적‧역사적 토대를 설명하기 위해 역사적 기억을 활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중국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역사적 기억이 가장 커다란 요소 중 하나이며, 역사적 기억이 중국의 정치와 외교관계를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기억은 여전히 오늘날 중국의 정치를 논함에 있어 가장 잘못 이해되고 가장 적게 언급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41쪽)
◆ 조작된 역사적 의식의 제도화
왕정 교수는 신화와 트라우마에 관한 중국인들의 역사의식과 그 복잡성이야말로 중국의 지배적인 이념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선택성-신화-트라우마CMT 콤플렉스’인데, 그는 이를 활용해 중국공산당이 자존감을 드높이는 과거의 영광(종이‧나침반‧화약‧인쇄의 4대 발명품, 명나라 때 정화의 원정,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최 등)과 매우 치욕적인 현대의 트라우마(아편전쟁의 패배, 일본의 침략과 난징 대학살, 주유고슬라비아 중국대사관에 대한 나토의 폭격, 2001년 중국 연안에서 발생한 미국 전투기 충돌 사건 등)를 선택적으로 부각시켜 역사 교육에 적극 활용함으로써 중국 특유의 민족주의를 만들어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엘리트 주도의 하향식 민족주의’라 명명하면서 1989년 톈안먼 광장 시위가 ‘수치스럽게’ 진압당한 후 젊은 세대들이 서구에 대한 깊은 반감에서 비롯된 ‘반외세적 대중 민족주의’에 경도된 상황도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의 핵심에는 ‘조작된 역사적 의식’이 교육을 통해 ‘제도화’되면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 민족주의야말로 오늘날 중국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추동력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에서 어떻게 민족주의가 맹위를 떨치게 되었는가?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적 기억이 갖는 힘을 탐색한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중국공산당은 근본적인 정당성 위기에 직면했다. 중국인들이 그 시대 문화대혁명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마오쩌둥을 중국의 독재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 때 개혁‧개방을 단행해 눈부신 경제성장의 물꼬를 텄으며, 장쩌민 주석에 이르러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대체하기 위해 ‘민족주의’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했다. 곧이어 강력한 애국주의 교육 운동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탱크맨’으로 상징되는 1989년의 톈안먼 광장 시위가 성공해 중국이 어느 정도라도 민주주의를 이루었다면 지금의 현실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중국공산당은 시진핑의 3연임을 통해 지금도 ‘동북공정’을 비롯한 역사적 왜곡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것이 공고화되는 데는 역사 교과서와 역사적 기념물 등이 바탕이 되었다. “한마디로 역사적 기억은 중국공산당이 자신의 정치적 힘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적인 도구였던 것이다.”
◆ 역사적 기억의 정치학
저자는 중국의 민족주의가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족주의는 복잡한 현상이다.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가 존재하는데, 시민‧종족‧문화‧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적 노선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현되는 민족주의가 존재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중국의 민족주의는 종교와 종족에 근간을 둔 것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중국의 민족적 경험과 강력한 역사의식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선택성-신화-트라우마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중국의 민족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다. 중심 왕국Central Kingdom[즉, 중국中國]의 자랑스러운 시민으로서 중국인이 느끼는 강력한 선민의식, 서구와 일본의 급습 때문에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는 경험이 바로 중국인들이 언급하는 ‘민족 치욕’의 구체적 내용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민족적 트라우마를 형성하는 경험인 것이다. 분명 역사적 기억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것은 탈냉전 시대 중국의 새로운 민족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파악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364쪽)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중국공산당의 폐부를 찌른다.
“당이 민족주의로 회귀한 것은 중국의 공동체를 재창조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인민들이 그들 스스로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 민족주의적 열망이 촉발되면 자신들이 공동체에서 축출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회적 불안, 정치적 불확실성의 시기에 연대감을 제공해주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로 판명되었다. (중략) 이러한 민족주의는 종족적 정체성과 역사적으로 형성된 영토 범위에 대한 애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67쪽)
◆ 중국 민족주의는 시장성을 갖춘 상품
우리는 저자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에 지적할 수 있는 흥미로운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중국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꼬집는다. 그리고 이는 결코 중국만의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중국의 저명한 언론인과 학자들]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의 관점은 객관적이다. 하지만 대중과 직접 만날 때, 그들은 갑자기 ‘반미 영웅’이 된다. 중국 사회 속에 반미 담론과 민족주의 담론을 위한 거대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행동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최근 중국의 사회적 맥락에서 민족주의적 목소리는 평화와 이성보다 더욱 시장성을 갖춘 상품인 것이다.
세계화의 결과로 나타난 또 다른 경향성이 있다. (중략) 톈안먼 광장에 각기 분열되어 서 있었던 학자, 기업가, 정부 관료들은 이제 서로 연합해서 새로운 ‘주식회사 중국China, Inc.’의 주주이자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 최고 대학의 교수들은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연구자금을 받는다. 이에 더해 정부 관료들과 군 장교들의 월급은 빈번하게 인상되며 그들의 수입은 지난 5년간 두 배가 되었다. 중국의 최고위층이 일치단결해 세계화와 일당 지배의 안정성을 칭송하면서 번영의 배당금을 나누는 데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380쪽)
◆ “기억 없이 정체성 없고, 정체성 없이 민족은 없다.”
왕정 교수는 위의 앤서니 D. 스미스의 말을 소개하면서 중국 민족주의의 굴기를 설명한다. 나아가 그는 강렬한 집단적 기억(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든 날조된 것이든)이 편견과 민족주의, 심지어는 국가 간 충돌과 전쟁의 뿌리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많은 사람이 중국의 일당 통치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군사력이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문제는 정체성 교육과 중국 내에서 세계가 이해되는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현재 동아시아가 직면한 안보적 도전에다 한중일 3국이 각기 겪고 있는 내부적 위기와 갈등(과거사 논쟁, 미중 갈등과 경제위기, 심각한 자연재해 등)까지 더해져 ‘평화’는 요원한 희망사항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2002년 한중일 3국의 역사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3년의 준비 끝에 공동의 역사 교과서를 펴낸 프로젝트가 성공한 경험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또한 캐나다의 국회의원이었던 어윈 코틀러의 말대로 “기억이 없는 곳에는 진실이 없다. 진실이 없는 곳에는 정의가 없다. 정의가 없는 곳에는 화해가 없다. 화해가 없는 곳에는 평화가 없다”는 사실도 늘 상기해야 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이제 동아시아에서 역사 교육은 국내 문제가 아니다. 역사 서술과 과거에 대한 해석은 늘 진정한 화해를 방해하는 장벽이었고, 각국에서 대중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심지어 최고 지도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정치적으로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역사적 분노를 적극 활용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중간연대middle-out’라는 방식은 동아시아에서 화해와 충돌의 해결을 위한 필수 단계이며, 3국의 공동 역사 교과서 프로젝트야말로 가장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