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들에는 사회의 변혁자·혁명가라고 생각했던 마르크스가 왜 이렇게까지 인간 사회의 학문적인 규명으로 치달았는가 하는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변혁의 운동이란, 사회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발전 법칙의 실현을 촉진하는 운동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선의에 근거하는 것이라도 과학적인 사회 인식이 빠진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 이것이 마르크스 혁명 운동론의 근간에 있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덧붙여 이것도 마르크스의 큰 특징인데요. 마르크스는 사회의 개량이나 혁명을 향해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성장이나 발달을 “사회를 운동하게 하는 자연법칙”의 불가결한 요소라고 파악하였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밖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노골적인 자본의 논리에 저항해 이를 규제하고 제어하려는 노력을 거듭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는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힘을 점차 체득한다. 그 과정 또한 자본주의의 ‘자연법칙’의 중요한 내용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_〈b〉50쪽〈/b〉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독자로서 상정했던 이는 나름의 교육을 받고 나름의 생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책을 손에 들었을 정도였으니, 정치의식은 높고 정의감도 강했으며, 사회개혁의 열정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실을 과연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의 독자들을 향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몸에 파고들어 그들이 사는 세계를 상상력을 발휘해서 추체험해 달라고 그렇게 간청한 것 같습니다. 상상 속이긴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몸을 한번 파고들어 보면 이 세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자명할 것이다. ‘소외’라든가 ‘수탈’이라는 말이 개념이 아니라 신체적 굶주림이나 아픔으로 실감이 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_〈b〉81쪽〈/b〉
과로사나 요절(早死)을 포함한 건강 파괴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는 자본가의 행동도 개개인의 악의에서가 아니라 그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의 제 법칙에 의한 ‘강제’에서 설명되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충동으로부터 스스로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가 자본의 활동 자유를 제한하고자 행동하는 것도 마르크스는 그들이 처한 여러 관계로부터 설명합니다.
덧붙여 노동자가 만들어 내는 자본에의 사회에 의한 강제를 마르크스는 “국법”(②, 532쪽)에 근거하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활동에 대한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이 논점은 신자유주의로부터의 전환을 절실한 과제로 하는 현대 일본에서도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_〈b〉128쪽〈/b〉
‘쇠사슬’ 외에는 잃어버릴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인데요. 실은 쇠사슬 이외에도 잃어버릴 것이 있었습니다. ‘아이’입니다. 아무리 비참한 사회적 조건에 놓여도, 아무리 빈곤 속에 살아도 인간은 아이를 낳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대홍수’가 아닐까요. 즉 아이를 낳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등장입니다. 너무나도 심한 수탈의 결과, 노동자가 생물학적으로 재생산조차 할 수 없게 된 것. 너무 수탈을 많이 해서 급기야 수탈할 자원 그 자체가 고갈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에 있어 ‘대홍수’에 해당할 것입니다.
_〈b〉165쪽〈/b〉
여기서 엥겔스가 말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운동이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만인을 경쟁으로부터 해방하는 운동으로서 성장해 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강화해 나가면,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적대는 약해지고 “혁명으로부터 유혈과 복수와 격렬한 분노(는) 줄어든다.” 애초에 이 혁명은 노동자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며, 그와 같은 것으로서 “공산주의는 …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_〈b〉252쪽〈/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