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무를 읽어야만 열리는 세계가 있다.
세계적인 탐험가 트리스탄 굴리가 알려주는 나무에 새겨진 신호들
하루에도 수십 그루의 나무를 지나친다. 가로수길의 벚나무, 이웃집 마당의 무화과 나무, 산책길의 배롱나무‧‧‧‧‧‧. 당신에게도 아는 나무가 있는가? 그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그 나무의 이름(수종), 위치, 크기 정도일 것이다.
수십 년간 전 세계를 탐험하고 20년 동안 나무를 읽는 법을 가르쳐 온 트리스탄 굴리는 나무의 이름 자체보다 나무에 새겨진 자연의 신호(natural sign)를 발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나무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나무가 알려주는 신호를 읽을 수 있다면 인간의 감각으로는 경험할 수 없던 방식으로 나무의 미시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놓인 주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리스탄 굴리는 5개 대륙에서 탐험을 이끌고 홀로 대서양을 건넌 베테랑 탐험가다. 그의 이력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자연에서 얻은 단서를 활용해 길을 찾아 나가는 자연항법(natural navigatior)으로 탐험을 해온 전문가라는 점이다. 그에게 ‘자연 속 셜록 홈즈’라는 별칭이 생긴 이유다. 대부분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가 트리스탄 굴리처럼 숲에서 길을 잃고 나무의 신호와 단서를 통해 길을 찾을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직관적이지 않고, 때로는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자연을 이해하기엔 도시화, 문명화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나무는 자연과 관계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나무만큼 우리 일상에 가까우면서 인간과 다른 작동 방식을 지닌 생명체는 없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어법을 내밀하게 관찰해 온 트리스탄 굴 리가 알려주는 나무의 신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책에는 지금껏 그 어느 책에도 볼 수 없었던 나무의 단서와 신호들로 넘쳐난다. 나무뿌리, 나무껍질, 나뭇가지, 나뭇잎, 심지어 그루터기가 어ᄄᅠᇂ게 환경에 적응하고, 대응해 나가는지, 그 숨어 있는 신호를 발견하다 보면 나무를 넘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무가 들려주는 신호들을 따라 나무의 미시 세계에 들어설 때, 나무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나무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왜 똑같은 나무를 볼 수 없을까?
바람, 빛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경험을 하는 나무들
우리는 나무를 생각할 때, 그 나무가 속한 계통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같은 계통이라도 구조적으로 똑같은 나무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동물과 구분되는 특징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원숭이 A가 원숭이 B보다 팔다리가 더 길거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한쪽 팔이 없을 수는 있지만, 모든 원숭이는 유전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태어나고 자라난다.
개체에 따라 잘 안 쓰는 팔을 잘라내거나 다리를 지탱하기 어려워 새로운 관절이나 힘줄을 자라게 하지 않는다. 반면 나무는 계통에 따라 일반적인 규칙을 따르지만,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내고(자연 낙지), 길고 큰 가지를 버틸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될 때 인근에 새로운 목재를 자라게 해 버틸 힘을 비축한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나무의 구조와 생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유전자’, 바람과 빛과 같은 ‘환경’ 그리고 ‘시간’이다. 이것이 나무의 구조를 바꿀 만큼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 요소들은 나무 곳곳에 새겨져 무엇을 봐야 하는지 안다면 알아차릴 수 있다. 나무의 뿌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의 뿌리는 다른 방향의 뿌리보다 더 길고, 크며 강하게 자란다.
이 때문에 뿌리의 모양은 바람의 방향을 읽을 때 쉽고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나무줄기는 강이나 도로처럼 개방된 공간으로 뻗는 경향이 있다. 이는 빛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인데, 강가나 도로에서 일렬로 심어진 나무들이 인사하듯 기울어져 보이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줄기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가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바람과 일직선인 방향으로 볼 때 가장 얇아 보이고, 직각으로 볼 때 가장 두꺼워 보인다.
나무껍질의 경우, 그늘에서 잘 자라도록 진화한 나무는 껍질이 얇고, 햇빛에 노출된 나무는 껍질이 두꺼운 편이다. 질감이 매끄러운 껍질은 나무가 천천히 자랐다는 신호이며, 반대로 빠르게 성장하고 혹독한 환경에 놓여 있을수록 거칠다.
나뭇잎은 거친 바람이나 추위에 노출될수록 크기가 더 작아진다.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 자라는 나뭇잎은 그렇지 않은 곳의 나뭇잎보다 두껍다. 이 때문에 바늘 모양의 작은 잎을 가지고 있는 침엽수가 크고 넓은 잎을 가진 활엽수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살아남는다. 하지만 나뭇잎은 주변 환경에도 반응해 변하기도 한다. 주변에 나무나 건물 때문에 그늘이 생기면 잎은 그늘에서도 잘 견디는 모양으로 바뀌어 더 넓고 얇아진다. 이렇게 환경에 나무는 따라 변화하는 가소성(plasticity)을 가진다.
나뭇가지의 경우 유전자는 가지들이 줄기에서 멀어지게 자라도록 하지만, 햇빛은 가지들이 정확한 각도로 생장하도록 이끈다. 이 때문에 같은 계통의 나무라도 나무가 놓인 환경의 빛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가지의 굵기와 자라는 방향이 다른 나무를 보게 되는 것이다.
키가 큰 나무나 작은 나무는 많지만 중간 크기의 나무가 드물다. 왜 그럴까? 나무가 키가 크게 자라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에너지가 충족되지 못하면 키 큰 나무로 생장할 수 없다. 하지만 작은 나무가 되기를 택한다면 적은 빛으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에 중간 크기의 나무는 키가 큰 나무처럼 높이 뻗을 수도 없고, 작은 나무들이 받을 수 있는 바닥 근처 빛을 받기에는 너무 크다. 선택압(selective pressure)에 따라 중간 크기의 나무는 죽고, 키가 큰 나무와 작은 나무만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시간’도 나무를 읽을 때 알아야 할 중요한 요소다. 특히 시간은 나무에 대한 여러 오해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손이 닿는 나뭇가지 아래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고 가정해 보자. 정확히 5년 뒤 그 나무를 찾았을 때, 이름이 새겨진 가지의 위치는 높아졌을까 아니면 낮아졌을까? 우리는 흔히 나무가 위로 생장하기에 이름이 새겨진 가지의 위치가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로의 생장은 나무줄기 상단 부분에서 진행되고, 줄기의 하단은 더 이상 위로 생장하지 않고 둘레만 더 두꺼워지기 때문에 5년 뒤에 와도 그 내 이름이 새겨진 나뭇가지를 만질 수 있다.
이처럼 나무는 유전자뿐만 아니라 나무가 놓인 위치의 환경과 시간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에 같은 계통일지라도 나무뿌리, 나무줄기, 껍질의 상태, 잎의 모양뿐만 아니라 가지의 모양과 개수, 방향이 저마다 다른 나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분리와 생장 그리고 기다림의 반복,
나무가 살아남는 법
살아 있는 생물은 끊임없이 자극에 노출된다. 그 자극에 저항하거나 적응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며 성장과 쇠퇴를 반복한다.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나무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주변 환경에 대응하며 치열하게 생존해 나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햇빛이 너무 세거나 적은 곳, 바람이 많이 불어 척박한 곳, 질병에 걸리거나 병원균에 노출되었을 때 나무는 각각 상황에 맞는 다양한 전략을 시도한다. 그 시도의 결과들은 분리되고 생장한 흔적으로 온몸에 나타난다.
나무가 질병이나 주변의 척박한 환경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신호가 있다. 줄기나 가지에서 작은 가지(도장지epicormic sprout)들이 한꺼번에 자라나는 것인데, 이는 호르몬 변화로 숨어 있던 휴면아에서 자란 새싹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어린 도장지들은 죽고, 한두 개만 남아서 가지로 자란다.
가지는 광합성을 하는 잎을 붙들기 위해 빛을 향해 자란다. 하지만 주변에 새로운 나무나 건물로 인해 그늘이 드리워져 더 이상 빛을 수확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면 가지를 잘라낸다.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자연 낙지(self-pruning)라고 한다. 자연 낙지된 흔적은 눈(eye)처럼 생긴 모양으로 줄기에 흔적을 남긴다.
가지들은 햇빛이 있는 남쪽을 향해 있기 때문에 눈들은 남쪽에서 발견된다. 나무는 현재 닥친 상황과 앞으로 닥칠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 역시 신호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잎이 너무 센 볕에 노출됐을 때는 왁스층으로, 건조하면 털로 잎을 보호한다. 만약 잎이 광합성을 할 수 없을 때 얇은 나무껍질은 속살을 드러내며 잎 대신 광합성을 대신하기도 한다.
잎이 거칠게 느껴진다면, 너무 덥거나 추운 혹독한 날씨를 견뎌내야 한다는 신호이다. 껍질의 경우도 너무 센 햇빛이나 산불 등 자연에서 발생하는 재난에 대비해 일부러 두꺼운 껍질을 생장시키기도 한다.
병원균이 침입했을 때 나무는 줄기 내부에 세포벽을 강화해 감염 부위를 특정 구획 안에 가둬 나무 전체에 퍼지는 것을 막는다. 자연 낙지 과정에서 가지가 분리될 때도, 접합 부위를 송진이나 고무즙으로 분리된 접합부를 막아 병원균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다.
나무는 봄을 인지할 때도 혹독한 날씨에서 잎이 생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도 외에 밤의 길이로도 계절을 가늠한다. 이 때문에 1월의 이상 기온으로 온도가 높아져도 잎이 돋아나지 않는다. 온도도 일시적인 고락이 아닌 온도의 지속 시간에 민감하게 반응해 자신의 생장에 적합한 환경을 영리하게 파악하다.
나무가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와 스트레스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간단하다.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 보는 것. 그리고 그 시도가 어떤지를 기다림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에 맞는 다른 시도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는 나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한번 눈에 띈 패턴은 다시 숨어 있을 수 없다
나무 읽기와 호기심의 상관관계
나무를 읽는 법을 알기 전과 후, 우리에게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저자는 나무 읽기와 뇌의 관계를 십자말풀이에 비유한다. 우리의 호기심은 십자말풀이가 모두 빈칸일 때보다, 하나둘씩 채워질 때 더 강력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를 미국의 행동 경제학자 조지 뢰벤슈타인(George Loewenstein)가 사용한 ‘정보 격차(information gap)’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리를 인식할 때 인지적으로 박탈감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호기심이라는 것이다. 호기심은 일종의 욕구로, 심자말풀이에서 그 어떤 칸도 채우지 않았을 때보다 단어 몇 개를 알고 있고,
부족한 정보가 있다고 느낄 때 호기심이라는 욕구가 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이 찾게 되고, 더 많이 보게 된다(본문 212쪽)”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다음 앎으로 이어지는 연쇄 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무 뿌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더 크고 강하며 길게 자라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숲에 들어섰을 때 뿌리가 바람이 불어오는 남서쪽이 아닌,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뿌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인 남서쪽)과 현상(뿌리가 북쪽을 향함)의 괴리가 발생했기 때문에 “왜 이런 괴리가 나타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현재 관찰한 것에 불일치를 발생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굴리는 이 괴리를 풀 때까지 30분 동안 그 자리에서 나무와 주변 환경을 관찰했다. 그렇게 관찰을 하며 보내는 순간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나무의 뿌리가 숲의 가장자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자신이 보았던 괴리의 십자말풀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바람은 숲 중앙보다 주변에서 더 강하게 불고, 나무뿌리는 숲 가장자리를 향하게 된다.
북쪽의 뿌리는 숲의 탈출구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굴리는 “천 번을 본다고 하더라도 단 한 번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있지만, 한번 발견하고 나면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나무가 알려주는 신호를 읽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나무를 읽으며 생동하는 호기심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