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관객이 넘은 영화 〈서울의 봄〉을 뒤늦게 남편과 함께 봤다. 영화에 대한 소문은 호평 일색이었고 영화를 본 이들도 꼭 보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나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왜냐면 우리 현대사를 다룬 영화를 보고 나면 대부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내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뜻을 받들고 지키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회의와 비애감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SNS를 도배했다. 이런 와중에 일부 보수 단체, 유튜버 등의 반대로 중‧고등학교 단체 관람이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생각지도 못한 논란에 역사적 진실을 덮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결국 영화를 보기로 했다.
“찬란했던 서울의 봄은 그렇게 끝났다”라는 마지막 장면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고 동시에 ‘전선을 간다’ OST가 흘러나왔다. “성난 목소리, 한 맺힌 눈동자”라는 가사가 들렸고 영화 보는 내내 묵직하게 짓눌렀던 감정이 울컥했다.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눈물로 인해 흐릿하게 보였다. 내가 안다고 여겼던 오만함을 질타하듯 영화 곳곳에 몰랐던 진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안타까움에 한숨이 절로 났고 손에는 땀이 축축이 배였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영화 본 소감을 물었다. 남편은 “영화는 좋았는데 좀 아쉽네.” 순간 의외의 대답에 이해가 되지 않아 뭐가 그리 아쉬운지 재차 질문했다.
“역사적으로 서울의 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부마항쟁이 있어서 가능했는데 영화에서는 언급이 전혀 없네”
순간 남편 마음이 이해되었다. 부마항쟁 연구자인 남편에게 부마항쟁은 특별하며 남달랐다.
부마항쟁이 발생했던 1979년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중학생인 나의 관심은 뉴스와 세상 물정이 아니라 친구와의 관계, 부진한 성적이었다. 중·고등학교에서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배운 기억은 없었다. 1980년대는 5·18 광주항쟁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에 대학에 입학한 이후 줄곧 들었던 것은 ‘5·18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1979년 10·26 박정희 사망에서 1980년 5·18로 이어지는 역사는 알았지만 부마항쟁은 몰랐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부마민주항쟁’이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쯤 남편이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일에 관여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1979년 10월에 ‘부마민주항쟁’이라는 사건이 부산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딸들 키우고 살림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고 내가 주목한다고 하여 세상이 변하고 바뀔 것이란 기대는 없었다. 반면 남편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된 부마항쟁을 정작 당사자인 부산시민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남편과 이야기하다 보면 간혹 나만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관심이 없고 잘 모르나 싶어 주변 친척이나 지인에게 물었다. 딱히 아는 사람은 없었고 일부는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라고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2000년대쯤 남편은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연구가 학문적으로 미흡한 현실에 답답해했고 좀 더 제대로 연구하지 않으면 ‘부마민주항쟁’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고심했다. 또한 부산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우리 지역민이 모르고 외면한다면 그 당시 사건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정의와 진실은 묻히게 될 것이라 염려했다. 남편은 고민 끝에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고, 2009년 “참여 노동자를 통해서 본 부마항쟁 성격의 재조명”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피해자가 말하는 부마항쟁
남편은 대학원 졸업 후 본격적으로 부마항쟁에 대한 자료를 찾고 참여했던 사람들을 만나 구술하는 작업을 했다. 남편은 가끔 구술했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부마민주항쟁’ 피해자였다. 나는 ‘부마민주항쟁’에서도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항쟁 당시 경찰과 군인이 시위를 진압했으므로 당연히 피해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피해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것은, ‘5·18 민주화운동’이 끊임없이 언론에 노출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받고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려 했다면 ‘부마민주항쟁’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은 내가 부마항쟁 구술 녹음 파일을 풀어보겠다고 나섰다. 막상 시작해 보니 구술자 말이 생각보다 빨라 따라 적기가 힘들었고 시간도 꽤 걸렸다. 또한 시대 상황을 잘 모르다 보니 앞, 뒤 맥락을 이해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특히 말투에서 ‘어, 저, 그’ 등을 자주 사용하고 명확한 끝맺음이 없어 글로 옮기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정확한 녹취를 위해서는 녹음을 반복해 들어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성격 급한 나는 구술자의 말을 제대로 풀 수 없어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그때 녹취하면서 들었던 피해자의 증언은 나에게 피해자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그때 내가 들었던 구술자는 당시 20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시위대에 합류하여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고 했다. 군인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을 피해 가정집 부엌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누가 그곳을 알려주었는지 군인이 들어와 자신을 발견하고는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군화 발로 무지막지하게 폭행했다고 했다. 후유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한 달 이상 회사를 갈 수 없었고 그 이후에도 아픈 허리로 인해 잦은 결근과 조퇴를 해 결국 회사에서 잘렸다고 한다. 허리로 인한 골병은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허리 때문에 병원을 전전했다고 하는 이 녹음은 내가 처음 들었던 피해자의 육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았다.
또한 남편이 안쓰럽게 여기면서 들려줬던 피해자 ‘서회인’ 이야기는 잊히지 않는다. 그는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나와 같은 10대였다. 그래서인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서회인 어머니 김영자 님은 딸이 피해를 당해 고통스럽게 사는 동안 누구도 찾아와 사과를 한다든지 사고 원인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고통을 개인과 가족이 오롯이 짊어지고 살았다면서 한탄하셨다.
김영자 님의 증언에 따르면 동주여자상업고등학교(현 동주여고)에 다니던 서회인은 하교 후 귀가 길에 경찰이 던진 사과탄이 폭발하면서 얼굴을 맞아 쓰러졌고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친구들이 침례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어머니가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본 서회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흰 보따리로 덮어 씌워놨는데, 얼굴이 전부 다 파디비져 있었고 나중에 보니까 파편을 맞아노니까 곰보가 돼가 있었어.”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독한 최루가스가 폐속으로 들어가서 딸은 사고 이후 기침을 늘 달고 살았고 결핵에도 감염되었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기침과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결핵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고 한때는 마산에 있는 결핵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숨이 차고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목‧가슴 부분을 쥐어뜯는 딸의 고통이 근 20년이 넘게 지속되었고 어떤 치료도 별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서회인은 자신의 삶을 비관해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지도 못하고 39살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서회인 씨는 사건이 일어난지 42년 만인 2021년 10월 22일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서 ‘부마민주항쟁과 관련하여 상이를 입은 자’로 판단하여 부마민주항쟁 관련자로 결정되었다.
녹음으로 들었던 구술자와 서회인 씨가 당한 피해와 고통은 개인의 잘못으로 일어난 불행이 아니었다. 고통의 원인은 국가가 제공했었다. 당시 유신체제는 폭력적이었고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그런 불의에 저항하는 시민에게 국가가 폭력을 행사했다. 그 폭력에 평범한 회사원은 직장을 잃었고 평생 아픈 몸으로 세상과 부딪혀야 했다. 꽃다운 10대 소녀는 꿈을 잃었고 삶은 꺾였다. 뒤늦게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자 이해를 향한 행동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국희, 「역사는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