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새로운 콘텐츠를 구성해 내고 이것이 인간 창조 영역을 과감하게 침범할 것이라는 공공연한 주장이 위협을 주고 있다. 시대의 불확실성이 높아져도 AI가 만들어 낼 ‘지혜’가 이를 감당할 것으로 보고 있는가? 이런 시선의 활을 미래로 쏘아보고 그 화살이 닿는 곳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그만큼의 미래는 염두에 둘 일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오로지 오늘날은 불확실성만큼이나 피상적 앎과 지혜로도 살아가기가 충분하고, 주어진 답만으로도 아쉬움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안일함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린다.
지혜는 어떤 것이고 어떻게 구성되는가? 지식을 자기 속 ‘마음’에 담아 두면 지혜가 되는가? 그것이 부패하지 않고 지혜로 발효된다면 다른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찌하여 마음 안에서 ‘지식/앎’이 부패하거나 발효되는가? 그 갈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모든 경험은 지혜를 낳는가? 경험 안에서 ‘지혜’가 어떤 단어나 문장, 이미지로 구성되기까지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가? 경험이 쌓이면 그것이 지혜로 질적 비약이 가능해지는가? 또 경험 안에서 지혜를 누구든 건져 올릴 수 있는가? 낡은 경험, 이미 익숙한 경험, 그 경계 밖으로는 어떻게 나갈 수 있는가? 경험의 바다에서 표류하더라도 육지에 내리면 그것이 지혜로 창발되는가? 경험이 지혜로 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건 또 얼만큼이어야 하는가?
여사제 피티아의 말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를 늘 들고 있다면 지혜에 다가갈 수 있는가? 아마도 ‘모름’의 골 안에 지혜가 흘러 고일법하다. 외부에서 찾고 다가가기보다는 연꽃잎의 이슬방울처럼 조금씩 모이다가 너무 많다 싶으면 꽃잎이 기울어 남겨진 이슬방울조차 흘러내리는 그런 비움처럼, 모름과 비움의 연결에 지혜가 고이고 있을 법하다. 이쯤 되자 우리 말에서는 지혜를 ‘얻는다’라는 표현이 자연스럽지만, 일본어에서는 ‘낳는다(生む)’라는 표현을 쓴다는 걸 알고 작은 시기심을 가졌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에게 지혜는 찾는 것이고, 그들은 속에서 꺼내는 것인가? 그렇다면 찾는 것이 더 넓고 포괄적이다. 안이나 밖, 자연과 하늘 … 모든 천지에서 지혜를 찾을 일이다. 즉 지혜는 찾는 이의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지혜를 위해 위와 같은 어지러움을 거부한다. 평범한 서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들춰보며 그것이 어떻게 지혜로 다가가는 길인지를 소곤거린다. 그저 이런저런 생각의 상념을 따라 이야기를 풀면서 지혜의 입구를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단숨에 읽히지만 여운은 오래 남을 것이다. 슬픔, 친절, 용서, 연결을 위한 이음, 심지어 부러움과 열등감, 욕심마저도 지혜를 위한 땔감으로 정리한다.
즐거움과 가벼움, 평범함에서 찾는 지혜, 개인이 지닌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지혜, 그러나 언제나 매달리지 않고 흔쾌히 눈 쌓이듯 지혜를 쌓는 손맛이 어찌 피상성에 젖은 AI의 응답에 비할 것인가? 누구든 이를 파트너로 해 흉내 내거나 빌려 올 수 있어도 코치의 삶과 코치이와 독특한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지혜에 필적할 수 없으리라.
자기 지혜는 스스로 변화와 나아감을 위한 길을 비추기에 코칭의 주요 구성물이다. 지혜가 고이지 않는 코칭 대화는 텅빈 대화이다. 지혜의 경계만큼 성큼 갈 수 있고, 또 그 경계에서 지혜를 기다리며 들고 있던 지혜를 내려놓는다. 놓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들 수 없기에 이어지는 지혜를 위해 언제나 ‘비움’이 필요하다. 연꽃잎의 이슬처럼 담고 비움이 연속되는 지혜의 여정이 코칭 여정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코치가 손에 들고 있어야 하고, 언제든 코치이에게 선물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