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목공소’는 한옥일까, 아닐까?
소설가 박완서는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과 보문동에서 오래 거주했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은 동선동 한옥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한다. “50년대 초, 내가 결혼해서 시집살이를 한 동네는 좁고 꼬불탕한 골목 안에 작은 조선기와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붙어 있는 오래된 동네였다.” 박완서가 살았던 동선동 집 인근의 신흥목공소는 “조선 기와지붕만 겨우 남겨 놓”은 채 90여 년 동안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신흥목공소는 동서 방향의 블록 구조 모서리에 위치해 ‘가각전제(街角剪除)’라는 근대적 도시계획법이 적용되어 모서리가 사선으로 잘린 필지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한옥도 네모반듯한 정형이 아니라 비정형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한옥은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고유의 형식”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하지만 지금의 보통 사람들이 지닌 한옥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 기와집 정도다. 신흥목공소는 기와집이지만, 조선시대 기와집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신흥목공소는 한옥일까, 아닐까?
‘한옥’이라는 말은 개항 이후 1908년에 정동 지역에서 양옥, 일본 가옥(일옥)과 구분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고, 1970년대에 정부와 언론 등에서 적극 사용하며 전통 가옥을 통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기와집은 소수의 양반만이 사는 큰 규모의 주거 양식이었고,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기와집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규모가 작은 기와집이다. 일제강점기 한옥은 조선시대 집과 달리, 인구 급증과 심각한 주택난으로 밀도가 높아지고 생활 방식이 바뀐 도시에 적응하며 개발된 ‘도시한옥’이다. 박완서가 살았던 동선동 집과 신흥목공소는 모두 도시한옥이다.
지금의 한옥 붐은 2000년대 초에 도시한옥이 주였던 북촌과 인사동에 대한 보존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전주한옥마을, 서촌 등 오래된 한옥 주거지가 주목받았다. 더불어 한옥 관련한 각종 법제가 만들어지고, 한옥 용어에 대한 정의가 수립되고, 한옥 관련 국가정책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한옥은 짓고 관리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드는,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고급 주택이다. 현대판 양반 가옥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익숙한, 수백 년의 주거 문화와 새로운 주거 문화 사이에서 거주자의 필요에 따라 적응해 온 도시한옥은 전통 가옥이 아닐 수도 있다.
전통의 보존에는 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현재 우리가 북촌 등에서 보는 한옥은 이 도시한옥인데도, 우리의 관념 속 한옥은 팔작지붕의 기와집 즉 조선시대 양반 가옥이다. 왜 이런 현실과 관념의 괴리가 발생했을까? 도시 연구자이자 건축가인 저자는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한반도 전통 가옥의 역사를 꼼꼼하게 되짚는다. 건축기술적 측면뿐 아니라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 그리고 집과 건축에 대한 사회문화 권력의 개입 측면까지 두루 살핀다. 그가 사회문화적 측면까지 두루 살핀 까닭은, 그동안 한옥이 국가, 정부, 정치, 교수, 전문가, 건축(가) 등에 의해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형태’를 표본으로 해서 정의되고 보존되면서 많은 문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가나 엘리트가 한옥/전통의 형식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건축계의 가장 큰 논쟁이자 거의 유일한 논쟁이었던 부여박물관(김수근 설계) 논쟁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논쟁은 부여박물관이 일본 신사의 입구인 도리이(鳥居), 일본 신사의 지붕 끝 장식인 지기(千木), 사무라이 장수의 투구인 카부토(兜) 등 일본의 조형적 특성을 닮았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1967년에 왜색이 있는 국립박물관이라며 수많은 기사와 건축계의 비난이 쏟아졌고, 문교부 장관이 일본식이라고 밝혀지면 철거하겠다는 소견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부여박물관을 설계한 김수근은 일본 신사를 닮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 건축양식은 원래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수된 우리 문화 고유의 것”이고, “부여박물관에 소장된 토기의 그림 무늬에서 이 같은 선을 발견, 설계에 원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백제 연구자이자 부여박물관장인 홍사준과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는 전수되거나 고유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런 논란에도 부여박물관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이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정부는 도리이를 닮은 입구를 등나무로 가렸다가 몰래 철거했고, 지붕을 한식 기와로 덮었다. 이렇게 한국 건축계 최대의 전통 논쟁은 국가사업이어서인지, 김수근이 건축계의 실력자여서인지 알 수 없지만 형식 논란으로 빠르게 끝나 버렸다. 당시 건축계의 전통 논쟁은 역사의식이나 역사관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저자의 석사학위논문 〈자하문 길 주변 지역의 도시 건축 적응 유형 연구〉(2008)와 박사학위논문 〈서울 도시한옥의 적응태〉(2015)에 기초한다. 석사학위논문은 대한건축학회에서 우수석사논문상(2008)을 수상했고, 박사학위논문은 2015년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발표한 3편의 박사학위논문 중 하나였다. 석박사 논문 모두 자료 조사량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저자는 “조금 과장해 말하면, 조사 과정에서 서울에 있는 한옥은 다 봤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한옥은 사용을 위해 존재한다
저자는 움집에서 시작하는 한반도 집의 역사를 5개의 시대로 나누어 구성한다. 자연-이양-절충-전통-적응의 시대다. 그리고 이들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적응(Adaptation)’을 설정한다. 적응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내부 변형적 현상인 순응(adjustment)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능동적 개념이다. 적응은 “적절하고 유익하게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으로서, 외부 세계의 현실에 적당히 맞추는 활동과 환경을 바꾸거나 더 적절하게 통제하기 위한 활동을 포함”한다. 또한 “개인과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함께 어울림(adaptedness)’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러한 상태로 이끄는 심리적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아가 적응은 외부 환경을 수정할 수 있는 역량과 능력을 증진하는 기반이다. 가옥 분석에서 적응은 가옥 사용자가 각 시기 생활 문화, 기술 문화, 법제도 등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능동적으로 가옥을 유지하거나 바꾸는 활동과 행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적응 과정의 의미가 담긴 형태를 ‘적응태’로 규정한다.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의 집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는 개발업자들에 의해 도시한옥이 대량 개발되었다. 해방 후 정부 주도로 아파트(단지)가 공급되면서 주거가 획일화되었고, 한옥은 전통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한옥은 돈 없이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건축으로부터 외면당했고, 전통과 민족을 앞세워 정통성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한옥에 거주하고 한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변화에 ‘적응’하며 새로운 한옥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옥 적응태가 미학적·건축적·경관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적응태는 정답이나 고정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한옥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치열한 삶과 문화가 축적된 역사의 한 단면이고, 더 나은 공간이 되기 위한 발판이다. 기와가 덮인 팔작지붕이 아니더라도, 이것이 한옥이고 전통이다.
그동안 한옥은 국가, 정부, 정치, 교수, 전문가, 건축(가) 등에 의해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형태’를 표본으로 해서 정의되고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옥은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적응을 거듭하는 ‘삶으로서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