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팬데믹, 경제성장의 명암 속에서 떠오른 질문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28년 세계는 전쟁과 팬데믹의 후유증을 앓으며 경제대공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과 스페인독감의 여파 속에서 시작된 20년대가 산업기술혁신으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고도 빈부격차의 심화와 대공황의 충격으로 고꾸라지기 직전이었다. 도시는 날로 화려해지는데 먹고살기는 점점 힘들어진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변화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쟁과 전염병을 치르며 이미 사람들이 정부 역할의 중요성에 눈을 뜬 상황이었다. 백작부인부터 저명한 지식인까지 의식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다. 쇼의 처제 첨리 여사Lady Cholmondeley를 비롯한 지적인 여성들은 궁금해졌다. 대체 사회주의가 뭔데?
“사회주의는 부의 분배 방식에 대한 하나의 견해일 뿐”이고, “분배에 관한 다른 의견들보다 반드시 더 낫다고 할 수도 없다”며 버나드 쇼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가 얼마를 가져야 하는가. 이 문제는 정답이 따로 없고 사실 의회에서 결정하기 나름이다. 극단적인 “노예제부터 농노제, 봉건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다 실지로는 분배 방식의 차이”로 분배 문제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가 “자기 의견”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굳이 신경쓰지 말라면서 대신 생각해주겠다는 사람들(특히 정치인)이 늘 있지만, “그 사람들이 관심 있는 건 자기들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다.” 그들에게 의존했다가는 모르는 사이에 부당하게 털리고 열심히 일하고도 수중에 한푼도 남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지적인 여성을 위한 흥미로운 여정
지식과 경험에 ‘맥락’과 ‘깊이’를 더해주다
독자들은 기존의 분배 방식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분배 문제에 관해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역사와 경험에 비춰볼 때, 능력주의처럼 개인의 성과나 자질, 지위 등에 따라 누구는 더 주고 누구는 덜 주는 방식은 모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타고난 재능이나 자질에 아무리 차이가 나도 사람이 먹고 입고 자는 데 드는 비용은 대동소이하므로 소득은 똑같이 나누는 게 훨씬 간단하고 합리적이다. 소득이 같으면 더욱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져서 권력이나 지위, 명예 등이 적격자에게 분배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자”는 사회주의적 해법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중 연설의 귀재 버나드 쇼가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다들 그런다”면서 불평등한 분배로 인한 해악을 먼저 살펴보는 전략을 택한다. 아이들을 먹이고 교육해야 할 인력이 놀고먹는 부자들을 시중드는 데 낭비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당연시되고, 양심을 저버린 성직자와 교육자와 언론인이 판을 치고, 그밖에도 “우리가 매일같이 부딪히는 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소득불평등이 화근이다. 심지어 자연스러운 짝짓기를 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도 소득 격차다. 이렇게 해로운 분배 방식을 우리는 어째서 참고 견딜 뿐 아니라 옹호하기까지 할까? 부자들의 호화로운 씀씀이와 거기서 떨어지는 콩고물은 가장 무시당하는 계층의 가장 편협한 사람도 쉽게 알아보는 반면, 소득불평등이 야기하는 거대한 국가적 폐해는 사회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훈련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는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게 쇼의 설명이다. 독자들은 쇼가 펼쳐보이는 생각의 지도를 따라가며 이미 경험하거나 알고있던 것들도 새로운 맥락에서 재고하고 재의미화할 기회를 갖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욕망의 괴물이 아니라 마법사의 제자
버나드 쇼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 세계를 다시금 새롭게 돌아보면, 이 정도로 불평등한 분배는 애초에 우리가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욕망의 괴물이 아니다. 하지만 “자본은 그 속성상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우리는 (괴테의 시에 나오는) “마법사의 제자”가 됐다. 자본주의라는 빗자루를 불러내 실컷 일을 시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멈추는 법을 몰라서 애를 먹고 있다. 자본의 해외 유출과 실업, 과잉생산과 무역전쟁, 금융업자와 노동조합의 득세 등 자본주의가 벌이는 일들을 보면 우리도 로마제국처럼 문명이 이룩한 영광 속에서 몰락할 수 있다는 쇼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온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황이 발생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소득불평등이 야기하는 사회적 마찰은 심각하다. 사회는 평등이라는 기름칠을 해야 원활하게 작동하는 기계다. 그런데 그 기계 장치 안으로 심술궂은 악마가 계속 불평등이라는 모래를 집어넣는다. 각 계층 안에서 대략적인 평등이나마 존재하기에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다면 사회라는 기계는 전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고장과 파손, 중단, 폭발이 끊이질 않고 있다. 철도 노동자가 철도 조차장에서 압사당하는 사고가 일어나는가 하면, 사람 목숨을 구하겠다고 나선 수백만 명이 되려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르는 세계대전이 터진다. 단칸방에서 사는 없는 사람들이 돈 한푼 때문에 옥신각신 다투기도 하고 20년 넘는 소송으로 당사자들이 재산을 전부 말아먹는 일도 일어난다. 이 불행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연말이 돌아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땅에서는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지껄인다. 누구는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하는데 누구는 하루에 수천 파운드씩 벌게끔 분배해놓고는 서로 사랑하며 살자는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이 괜찮은가? 나는 못참겠다. p.812
다행히 자본주의는 치유가 가능하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사유재산제를 제대로 알고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금융시장의 본질을 간파하고 나면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가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이미 마련돼 있다. 대단한 혁명 따위는 필요없다. 실질적인 자본주의 치유책은 새삼스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소득 재분배는 보수 정부든 진보 정부든 숱하게 해왔던 일이다. 중요한 것은 평등을 향한 의지다. 그런 의지가 없다면 “국가가 보증하는 불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문명의 몰락을 가속화할 것이다.
불평등을 바로잡지 않으면 몰락을 피할 수 없다. 독재자를 세우든 자유를 부르짖든 다 소용없는 일이다. 나라면 사회주의를 민주주의와 연결짓기보다는 그냥 가톨릭이라고 부르겠다. 수많은 교회가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너무 헛되이 사용하는 바람에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가톨릭이란 본래 보편타당하다는 뜻이다. p.595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버리는 게 사회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버릴 용의가 있다”
열린 마음으로 최선의 분배 방식을 찾아나선 독자들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여정에서 우리 사회의 생존과 번영은 평등한 분배에 달려있다는 진실을 거듭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편견과 오해가 그러한 진실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소득평등화는 실현 불가능하다느니 설사 실현되더라도 어차피 얼마 못 가 다시 지금처럼 될 거라느니 하는 반론은 버나드 쇼에게 가뿐히 제압당한다. 기회의 평등은 헛소리로 취급된다. 소득평등화를 지향하는 것이 사회주의이고 소득평등화가 이루어진 사회란 모두가 상호 결혼가능한 사회라는 단순명쾌한 정의를 바탕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잘못된 통념들이 바로잡힌다. 무정부주의는 사회주의와 무관하고 노동조합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자본주의에 불과하다. 개인의 청빈이나 자선활동을 사회주의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십계명도 법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듯 사회주의도 처음부터 끝까지 법과 제도로 해결할 문제다. 유행에 뒤처진 사람이 될까 봐 옷도 마음대로 입지 못하는 사회에 살면서 사회주의가 자유를 억압한다고 주장하는 건 우스울 뿐이다. 소득평등화가 이루어지면, 그 동안 프롤레타리아가 멸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온갖 규제들이 사라지고, 지배계층과 직능단체의 횡포에서 벗어나 개인들이 타고난 덕성을 발휘하며 살 것이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자유와 사교를 보장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때가 오면 “사회주의라는 허접한 단어는 사람들 뇌리에서 잊힐 것이다.” 쇼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너무 과분한 명칭이고 사회주의는 너무 형편없는 명칭이다. 혼란스러운 명칭과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떠드는 사람들이 현실을 바벨탑으로 만들고 우리가 바라는 사회 건설을 요원하게 한다. 그래서 쇼는 “사회주의자들만 아니었으면 사회주의가 진작에 실현됐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사회주의에는 가톨릭이라는 명칭이 훨씬 잘 어울렸을 거라고도 했다. 교회 때문에 용어에 대한 편견이 있을 수 있지만, 가톨릭은 본래 보편타당하다는 의미다.
열 사람이 열 사람 부양하기도 힘든 시대에서
한 사람이 열 사람도 부양하는 시대로
산업혁명이 또 다시 반쪽짜리 축복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1937년 펭귄북스는 과학과 교양 서적의 대중화를 목표로 자매문고인 펠리컨북스를 론칭하고 그 역사적인 첫 책으로 ⟪자본주의+사회주의 세상을 탐험하는 지적인 여성을 위한 안내서⟫ 개정판을 출간했다. 초판 발행 이후 약 10년 동안 달라진 세계 정세를 반영해 개정판에는 〈소비에트주의〉와 〈파시즘〉 두 챕터가 추가됐다. 84장 〈소비에트주의〉에서 버나드 쇼는 공산주의 실험에 도전한 러시아를 응원하면서도,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소득평등화의 원칙을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을 보며 관료와 전문가 집단의 결탁으로 러시아가 금권정치로 갈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리고 우리는 쇼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걸 알고 있다. 85장 〈파시즘〉은 그저 지난 세기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곳곳에서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의회가 습격당하고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인물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다. “의회가 그때그때 할 일을 못하면 언제나 파시즘이 고개를 든다”는 쇼의 말대로다. COVID-19 팬데믹과 대규모 전쟁까지 겪게 되자 기시감이 들기 시작한다. 우리 100년 전에도 이러지 않았던가?
100년 전 쇼는 산업혁명이 “반쪽짜리 축복에 그치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산업화와 기술혁신으로 부와 여가가 엄청나게 증대됐지만 혜택이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노예처럼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쇼가 부의 균등한 분배를 말하자 (비록 책은 불티나게 팔렸지만) 당시 사람들은 꿈 같은 소리로 받아들였다. 사회주의자들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조차 주춤하며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AI혁명, 소위 4차산업혁명으로 부가 점점 더 한쪽으로 쏠리고 일자리는 대거 소멸되거나 저급화할 위기에 처한 우리는 쇼의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 없다. 자본주의 분배 방식은 이미 오래 전에 유효기간이 다했다. 금융위기와 노사갈등, 계층혐오 등의 문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도지는 만성질병처럼 우리의 정신을 좀먹고 인간다운 생각과 행동을 방해한다. 100년 전과 같은 세계사적 변화의 소용돌이는 다시 우리를 100년 전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가난에 대한 공포와 노예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계속해서 우리를 지배하게 놔둘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술발달과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온전한 축복이 되게 할 것인가? 우리의 지식과 의지에 미래가 달렸다. 빗자루를 불러낼 줄만 아는 마법사의 제자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로보캅〉에서와 같이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우리 중에는 자본주의라는 빗자루를 제대로 부리겠노라 다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버나드 쇼 말대로 “감탄도 분노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이 책은 그런 지적인 시민들을 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