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무 일족의 망명
티벳에서 출발한 장강은 광활한 대륙의 중앙을 동서로 관통해 상해를 적시며 바다로 빠져나간다.
강의 중류 양쪽에 동량산東梁山과 서량산西梁山이 우뚝 솟아 있다.
그 두 산을 천문산天門山이라고도 하는데, 거센 파도가 하늘 문을 두 조각 냈다는 뜻이리라.
때는 춘추 후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초여름날 오후였다.
천문산을 휘돌아 내려온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하류에 늙은 뱃사공이 탄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그 배 위로 큰 키에 깡마른 청년이 훌쩍 뛰어올랐다.
아직 스물이 안된 손무(545~470)였다.
손무가 뱃머리에 털썩 앉자, 사공이 긴 장대로 강변을 쭉 밀어 배가 중원을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배는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 위에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되어 곡예하듯 넘고 또 넘어갔다. 물벼락이 쉴새 없이 사공과 손무의 온몸을 내리쳐도 둘 다 요동하지 않았다. 사공이야 장강에서 뼈가 굵고 늙어 그럴 수 있다지만 손무가 의외였다.
무엇에 그리 골똘히 빠져 거센 파도도 안중에 없었을까.
‘난세를 정리할 원리.’
손무는 그 생각 외에 다른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인간의 길흉화복을 알기 위해 점치는 풍습이 만연하던 때였다.
주나라 이전의 상나라 때는 더 심했다. 아예 왕이 나라의 제일 큰 무당이 되어 국가 대사를 앞두면 거북 등에 손을 얹고 점을 쳤다.
그나마 주나라에 와서야 왕이 무당 역할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술적 분위기는 여전했다. 이런 분위기에 손무가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병법서를 쓰고자 했으니….
하기는 그즈음에 공자(551~479)나 노자(604~연도 미상)도 인의仁義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외치고 다녔다. 중원에 인간이 정주한 이후 처음으로 인문학적 사색의 풍조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설파하고 다녔다면, 노자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언급했다.
온 천하가 두 현자가 내놓은 당위성에 주목할 때, 손자는 난마처럼 얽힌 현실의 타개책을 궁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옛 전쟁터를 답사하고 다녔던 것이다.
황제와 치우가 싸웠던 탁록涿鹿의 들, 상商나라 탕왕湯王(1600〜1589)이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격파한 명조鳴條 벌판, 주周나라 무왕 武王(1046〜1043)과 상商나라 주왕紂王(1075〜1046)이 결전을 벌였던 목야牧野 등, 주로 주나라 건국 이전까지의 유명한 전쟁처를 수차례 둘러보며, 양측의 지형地形, 군세軍勢, 작전作戰 등을 비교하고 분석했다.
그럴 때마다 품고 다닌 책이 《육도삼략六韜三略》.
주 무왕을 도왔던 강태공姜太公이 지은 전략서이다. 이 책을 저절로 암송이 될 만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 오나라로 망명한 후부터 아버지 손빙孫憑의 가르침에 따라 주나라 건국 이후 춘추 말기까지 벌어졌던 전적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 배를 탄 것이다.
왜 손무는 병법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했을까?
그의 집안 내력과 관련이 깊은데 먼 조상인 순舜임금까지 연결되어 있다.
기원전 1,046년이었다. 상나라를 무너트린 주 무왕이 완구宛丘(하남성 회양)를 순행하던 중, 우연히 순임금의 후손 규만嬀滿을 만나 사위로 삼고 진陳나라의 제후에 임명했다.
그렇게 세워진 진나라가 16대 선공宣公(692〜648) 때 일대 혼란에 빠진다.
선공이 첩의 아들 규관을 후계자로 삼으려 태자 어구를 죽인 것이다.
어구의 최측근이던 진완陳完-14대 진여공陳厲公(706〜700)의 아들-도 일가를 데리고 황급히 제나라로 망명했다. 이래서 손자의 선조인 진완이 제나라 사람이 되었다.
인구가 부족해 후덕한 군주가 다스리던 나라로 집단 탈주가 자주 일어나던 시대라, 진나라 왕족이 오자 제환공齊桓公(685〜643)이 달려나가 맞이했다.
자신의 덕을 중원에 알릴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진완에게 전국의 수레 생산 등 수공업을 관리하라며 공정工正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후 진완은 제나라에 영구히 정착한다는 뜻으로 성까지 바꾸어 전완田完이라 했다. 이렇게 탄생한 전씨 일족은 백여 년간 번성하기도 했거니와, 출중한 인물이 많아 제나라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중 전완의 4대인 전환자田桓子가 특히 유명했는데, 기원전 545년에 자신의 씨족 전씨를 중심으로 포씨鮑氏, 고씨高氏, 난씨欒氏와 뭉쳐 명문거족 경씨慶氏를 제거했다.
몇 년 뒤 다시 포씨와 연대해 또 고씨와 난씨를 쫓아냈다. 그러면서도 춘궁기면 백성에게 대두大斗로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철에 소두小斗로 돌려받았다.
이로써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던 민심이 전환자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전환자에게 다섯 아들-전개田開, 전걸田乞. 전소田昭, 전서田書, 전자단田子亶-이 있었다. 그중 야심이 제일 큰 전걸이 제경공齊景公(547〜490)에게 중용되더니 아버지 전환자처럼 세금을 거둘 때는 작은 되, 양식을 줄 때는 큰 되를 사용해 은근히 민심을 모았다.
이를 본 경공의 명재상 안영晏嬰이 경공에게 “전걸의 민심 호도책을 금지시키시오”라고 권했지만 “별일 아니다”라며 무시당했다. 이래서 전걸의 세력이 계속 확대될 수 있었다.
그후 기원전 547년 전걸의 동생 전서가 거筥 땅을 점령했다.
경공이 전서의 공을 치하하며 낙안樂安 땅을 영지로 주고 손씨孫氏 성을 하사했다.
무슨 뜻일까?
제경공도 욱일승천하는 전씨 세력에 내심 부담을 느끼고 전걸과 용맹한 전서를 분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걸은 변함없이 권력을 독점할 궁리만 했다. 그런 전걸에게 손서로 성을 바꾸게 된 전서가 수차례 당부했다.
“형님, 진나라에서 제나라로 망명 온 우리 가문이 이만하면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 땅은 무왕이 강태공에게 준 곳으로 강씨의 봉읍지입니다. 이를 유념해 주세요.”
그러나 전걸은 번번이 거절했다.
“하하하하. 그러냐. 잔소리 말고 형이 하는 대로만 따라오거라. 다 우리 가문이 잘되자고 하는 일이다.”
만일 이대로 전걸이 세력을 계속 확장한다면?
그 끝은 제나라 군주 자리였다.
어느덧 나라 분위기도 내란에 준할 만큼 살벌해지고 있었다. 그 시기에 손서의 아들 손빙도 대부가 되어, 정치에 깊이 들어가 보니 매우 심각했다. 머지않아 군주에 대한 충忠이냐, 가문에 대한 의義냐를 선택해야 될 상황이던 것이다. 깊은 고뇌 끝에 손빙은 제나라를 떠나리라 결심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선조의 나라 진陳이 있는 중원 쪽을 제외하면 남방으로 갈 수밖에 없어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 중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그중 초나라는 제외했는데, 장왕莊王 이후 기울고 있던 데다가, 평왕平王이 간신 비무극費無極의 꾐에 넘어가 태자 건建의 며느리가 될 진晉나라 공주를 가로채며 내정이 혼돈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다음이 오나라와 월나라인데, 월나라는 너무 멀었다.
산동 반도에서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장강 아래가 바로 오나라였고, 더 아래로 내려가야 월나라가 나온다. 그래서 피신하기에 가까운 오나라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