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그럼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모두가 ‘원시시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하향평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 말은 고대국가의 왕과 귀족이 백성과 노예에게 했던 말과 유사하다. ‘내가 너희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최소한 잠자리와 굶어 죽지 않을 식량은 주지 않느냐? 나에게 감사하라. 원시시대였다면 너희들은 집도 음식도 없이 야생의 벌판에서 굶어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현대에도 유행하고 있다. 세계에는 아직도 왕이 부를 독점하는 나라, 몇 명의 재벌이 국가의 부 90% 이상을 소유하는 나라들이 있다. 그 국가의 국민들은 불평등한 부의 구조를 바꾸라고 요구한다. 이때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카타르 왕족의 예를 들어보자.
‘민주주의가 모두가 평등한 체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석유를 개발 판매한 돈으로 너희들에게 집과 직장을 주고 있다. 먹고 살만하지 않느냐? 또 월드컵을 유치해서 볼거리를 제공해주지 않느냐? 카타르 국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느냐? 불과 몇십 년 전을 생각해보라.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땅에서 모두가 굶주리고 살지 않았느냐? 그것이 평등이고 민주주의라면 그 시절로 돌아가라. 굶으면서 실컷 민주주의를 즐겨라.’
이렇게 말이다.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로움이 언제나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경제발전이냐 민주주의냐는 딜레마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모두가 평등하지만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발전과 함께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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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로마의 간접민주주의를 경험한 후, 1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중세, 르네상스, 절대왕정을 거친 후, 17세기 유럽 전역에서 계몽주의 사상이 태동했다. 계몽주의는 철학, 종교, 예술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 그 요지는 기존의 권위와 관습을 타파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계몽주의는 각 나라의 상황에 맞게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 변화를 주도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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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민주주의의 특징과 과제
현대 독일의 민주주의 체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연장선 속에 있다. 다당제의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면서 내각의 수상이 최고 권력을 갖는다. 진보를 대표하는 사회민주당과 보수를 대표하는 기독교민주당이 가장 주요한 당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 중의 하나이다. 또한 유럽연합의 지도적 국가로 이탈리아나 프랑스, 영국에 비해 이민자나 난민에 대해서도 관용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나치의 부활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게르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서 대립해 왔던 독일은 게르만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숱하게 경험한 나라이다. 유럽의 변방으로서 열등감을 지녔던 독일인은 독일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신나치주의 선동에 언제 열광할지 모르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위험성을 잘 견제하는 것이 독일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 93~94페이지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었다. 그러나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동시에 필요하다. 사회적 불평등과 경직성은 어느 정도까지는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하지만 곧 한계에 직면하여 경제를 동맥경화로 이끈다. 경제 발전의 필요조건은 민주주의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지배 세력은 기득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고, 민주화 요구에 군사독재로 대답했다. 브라질의 극우 세력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르헨티나의 민주화 세력을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한다. 개개인의 평등한 권리 요구가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에 무너지는 것은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르헨티나는 종종 아름답고 열정적인 나라로 인식된다. 탱고와 축구, 마라도나, 메시, 드넓은 목장, 미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름다운 해변 등으로 대표되는 아르헨티나의 이미지 속에는 수만 명이 학살, 실종된 독재정권의 역사가 있다.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는 불안하다. 현재까지도 아픔은 치우되지 않고, 기득권 세력과 시민사회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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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나치’
제2차 세계대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영연방으로서 연합국의 편에 서기는 했지만, 전쟁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피해는 입지 않고 대신 전쟁 물자를 수출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극우인 보어인의 국민당은 나치의 편에 섰다. 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연합국의 편에 서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는 사이 나치에 반대하고 흑인의 권리 회복을 요구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탄생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백인들은 국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당은 다수당이 되었고, 아파르트 말랑이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2차 대전이 끝나자 본격적인 인종주의 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이 그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다.
1956년 국민당은 더 나아가 유색 인종에게서 참정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은 참정권과 피선거권조차 박탈당한 ‘노예’였다.
- 167~168이지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은 메이지유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진행된 임진왜란에서 패퇴한 일본은 전국에 소국이 난립하는 혼란한 상태였다. 160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에도막부를 세웠다.
에도막부는 3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과도한 신분제로 인하여 민중과 하층 사무라이들의 불평을 샀다. 자유 민권에 대한 요구가 싹트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의 지배 계층인 막부에서는 형식상으로 서양의 제도를 재빨리 수용하여 민중의 변화 요구를 무마하고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도모코자 했다. 결국 1868년 시작된 메이지유신은 1889년 일본제국 헌법을 발표하면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은 민중적 관점에서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 198-199페이지
민정의 탈을 쓴 장기독재로
1961년에 시작된 군정은 1963년까지 계속되었다. 시민들은 군정 종식을 요구했다. 쿠데타 세력에게도 군부 통치는 더 이상 명분이 없었다. 처음 약속한 대로 민정 이양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그 준비는 민정의 가면을 쓴 군부의 장기집권을 위한 계획이었다.
박정희를 위한 정당 설립이 막후에서 진행되고, 영구집권을 위한 헌법이 비밀리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국가가 안정되면 군인의 신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 그가 남긴 출마의 변이었다. 정치를 하고 싶지 않지만 국민의 뜻을 받들어 출마한다는 논리였다. 이는 군인과 정치의 분리를 원하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러나 이미 1961년부터 쿠데타 세력은 민정 이양 이후에도 자신들이 집권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막대한 선거자금과 언론의 일방적인 지원에 힘입어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심성 자금이 막대하게 살포되고, 조직적으로 투표인들을 실어 나르고, 언론은 그를 애국주의자로 찬양했다. 그가 처음 말한 민정 이양은 거짓말이었고, 군정은 유사 민간통치로 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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