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우리의 일이다
비혼 비출산 시대, 여성에게 모성이란 무엇인가
여성들은 남성보다 학업 성적도 더 좋고 대학을 더 많이 졸업하는데도 성별 소득 격차에서 밀리고 가정과 커리어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데 실패하곤 한다. 202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클라우디아 골딘은 ‘탐욕스러운 일greedy work’에 지나치게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경제구조에 원인이 있다면서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주문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중요하지만 대부분은 쉽고 빠르게 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한정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개인이 사회구조가 바뀌고 내 삶이 달라지길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비혼, 비출산을 선택한다. 결혼과 출산이 더 이상 인생의 과업이나 윤리적 의무가 아닌 시대,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전전긍긍하는 워킹맘이나 집에서 놀고 먹는다고 손가락질받는 전업주부, 자기 아이를 끼고 도느라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맘충이 되지 않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 현재 2024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68명 정도로 예상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비출산을 선택하는 여성들은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2023년 국제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멕시코 소설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는 바로 여성에게 주어진 모성 선택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라우라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아무 부담 없이 연애를 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비혼 여성이다. 학업과 논문에 대한 열정,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파티, 원할 때마다 훌쩍 떠날 수 있는 해외 여행 등 삶에는 즐길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고, 라우라의 삶에서 결혼과 출산은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다. 파트너의 유혹에 굴복할 뻔한 순간, 그 즉시 난관수술을 감행할 만큼 비출산에 대해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는 라우라. 소설에서 라우라는 자신을 포함해 각기 다른 다섯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때 라우라와 같은 신념을 공유했지만 이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난임시술을 받으면서까지 아기를 원하는 친구 알리나, 도저히 통제되지 않는 아들을 홀로 키우느라 삶의 의욕마저 놓아버리는 옆집 여자 도리스, 딸의 비출산 선언을 듣고 비로소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는 라우라의 어머니, 그리고 알리나가 낳은 아기를 돌보는 보모 마를레네까지.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이들에게 모성은 중요한 화두이자 문젯거리이다.
라우라는 옆집 여자 도리스가 폭력적인 어린 아들 니콜라스 때문에 차츰 시들어가다 우울증 에 빠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한편, 니콜라스의 문제가 어른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아이 하나를 제대로 키우는 일이란 얼마나 고단하고 무거운지. 그리고 어째서 고통은 오로지 엄마들의 몫인지. 라우라는 니콜라스와 가까이 지내면서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의외의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친구 알리나가 아기를 가지면서 기대한 일도 기쁨과 보람 같은 긍정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장애 판정을 받고 생존 자체도 장담할 수 없게 되면서 출산에 대한 기대는 비극을 예고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다정하게 살아갈 거야
삶에 대한 의지와 연약한 존재에 대한 사랑,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의 원제 ‘La hija única’는 ‘외동딸’이라는 뜻이지만 말 그대로 ‘유일한 딸’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어 유일무이한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국어 제목에서는 알리나의 딸에게 주어진 이름 ‘이네스’를 강조한다. 이네스는 17세기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태어난 페미니스트 시인의 이름으로, 남아메리카 여성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름이다. 치안이 불안정하고 노골적인 남성중심주의가 살아 있는 멕시코에서 딸을 낳는다는 건 어쩌면 기뻐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알리나는 기꺼이 배 속에 있는 딸아이에게 이 부적 같은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활택뇌증을 갖고 태어난 이네스는 의사들의 비관적인 전망과 달리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임신과 출산, 육아는 기쁨이자 즐거움인 동시에 고통이고 슬픔이다. 이미 아이를 다 키우고 노년에 이른 라우라의 엄마는 “자식은 인생의 기쁨이야. 조건 없는 사랑으로 채워 주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 주지.”라고 판에 박힌 모성 찬양을 늘어놓다가도 아이들을 키울 때 겪었던 '불치병 같은 피로감'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며 라우라의 비출산 선언에 공감한다. 더 이상 결혼과 출산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 어떠한 선택을 하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이 무거운 짐이 여성의 삶을 짓누른다.
보드랍고 귀여운 아기를 안고 피부를 맞대고 맑은 눈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보모 마를레네에게서 보듯, 때로는 남의 아기를 맡아 키우면서까지 채워야 할 기본적인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낳을 아기가 천사처럼 착하고 순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으랴. 말도 안 듣고 폭력적인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영원히 지옥에 갇힌 기분을 맛볼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면, 겨우 살아남는다 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면, 아기를 갖기로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일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어머니 되기에 관한 여러 선택과 그에 따른 다양한 결과를 보여주지만 출산과 비 출산 사이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모성이란 결국 삶과 죽음, 가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진짜로 이야기해야 하는 주제는 여성의 출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와 연약한 존재에 대한 돌봄, 사람 사이의 상호 이해와 연대라는 것. 이야기는 모성을 다루는 의료 시스템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과 페미니즘 시위까지 오늘날 여성을 둘러싼 다양한 문젯거리들을 다룬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삶이란 매순간 결핍과 부정의 감각을 강요당해 왔으나 지금은 아니다. 으스대는 의료 전문가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 진단을 내린 이네스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장애를 갖고 있으며 장기적인 생존을 장담하기도 어렵지만 이네스의 삶은 유일무이하며, 이네스가 삶에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은 오직 이네스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이란 저마다 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을 터. 출산이란 한 생명을 낳는 것, 그리하여 어머니가 되든 되지 않든 모성이란 여성의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핵심 요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는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 여성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