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나와
꼭 해 보고 싶은 일은
사막에서 천막을 치고 일주일 정도 지내면서 잠을 자기,
전영애 교수 번역본 『말테의 수기』 끝까지 읽기,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그런 일들을 끝까지 나는 이룰 수 있을는지…….)
―서시 『버킷 리스트』에서
50년 시인 생활을 되돌아보며 찾은 진정한 삶의 의미
나태주의 ‘시로 쓴 버킷 리스트’
50여 년 동안 우리 곁에서 세상에 대한 ‘바라봄’을 시로 전해 온 나태주 시인, 이번에는 그가 시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버킷 리스트를 독자에게 전한다.
2007년 교장 퇴임을 앞두고 췌장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겪었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해 13년째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투병하며 첫날처럼 마지막 날을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단 걸 이해하게 됐”다고 덧붙이며 죽음 역시 삶 못지않게 소중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밝힌 바 있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 흔히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들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버킷 리스트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나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교수형을 집행할 때 쓰이기 시작했다는 가설이다. 목을 매단 죄수의 발 아래 놓인 뒤집어진 양동이(Bucket)를 발로 차 교수형을 집행한 데서 온 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태주는 우리에게 죽기 전 해야 할 일들이 아닌, 일상 속에서 작은 것 하나씩 실천해 나간다는 의미의 새로운 ‘버킷 리스트’를 다정히 건넨다.
오늘도
안녕!
너의
맑은 영혼의 호수에
내가
구름 그림자 되지 않기를!
꺼졌던 전깃불 다시
살아나듯이.
―「아침 안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의 문턱에서 시에 대한 애틋한 마음 하나로 투병 생활을 버틴 시인은 기꺼이 자신 그리고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살아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건넨다. 늘 주고받는 일상적인 ‘아침 안부’가 아닌, 안온한 삶을 빌어 주는 따스한 기도를 전하기도 한다.
하루하루 삶이 꿈이고
순간순간 숨 쉬는 일이 기적이고
내가 누구를 그리워하고
누군가 나를 생각함이
이미 버킷 리스트 그것인데
어찌 또 버킷 리스트가 있을까요?
하지만 나에게도 남아 있는 버킷 리스트가 있답니다
―「시로 쓴 버킷 리스트」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시인은 다시 찾아온 삶의 온기를 소중히 품은 채,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버킷 리스트”를 종이 위에 펼쳐 본다. “하루하루 삶”과 “순간순간 숨 쉬는 일”이 꿈이고 기적이 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달은 그에게 아직 남은 버킷 리스트는 과연 무엇일까?
시집 『버킷 리스트』는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내가 세상에 나와 해 보지 못한 일” “내가 세상에 와서 가장 많이 해 본 일” “내가 세상에 나와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그것이다.
1부인 ‘내가 세상에 나와 해 보지 못한 일’에서는 일상 속에서 그동안 미처 돌아보지 못한 소중한 순간들을 들여다보기를 청유한다. “다만 그저 봄이 와 파르르 떨고 있는 뽀오얀 봄맞이꽃”을 지그시 내려다보기, 어느 일요일 오후 곤히 자고 있는 아기 바라보기, 그리고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우며 왠지 모르게 ‘너’를 닮은 풀꽃 안아 보기……. 단정하고 따스한 시인의 언어로 독자에게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골고루 ‘바라볼 것’을 권한다. 시인에게 있어 ‘바라봄’은 그 행위 자체로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아닐까.
2부 ‘내가 세상에 와서 가장 많이 해 본 일’은 나태주 시인이 삶을 살아가며 느낀 단상들을 주로 모았다. “웃어서 행복한가 행복해서 웃는가”라는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어쩌면 그 둘이 “함께 답”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웃어서 행복”한 것이 아닌지 넌지시 시인의 언어로 그 답을 펼쳐 보인다. “기다리면 오지 않고” 기다림에 “지쳤거나 기다리지 않을 때 불쑥 찾아”오는 누군가를 끝없이 그리거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그 “풀기 힘든 문제”에 대해서도 담백하게 털어놓는다.
마지막 3부는 시인이 ‘세상에 나와 꼭 해 보고 싶은 일’을 담았다. 삶의 마지막 날까지 그의 곁을 지켜 줄 소중한 이들에게 “이것이 우리들 마지막 날이 되고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감사 인사 잊지 않기,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살게 하”는 기도 드리기, 그리고 “다른 나라의 젊은 청춘들이 우리글 한글을 배워 내가 쓴 한글 시를 한글 그대로 읽어 주는” 꿈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기.
오늘도 열심히 죽어서 잘 살았습니다.
―「퇴근」
시인은 “열심히 죽어서 잘 살았”다는 말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마무리한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는 청춘,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불안한 중년, 삶과 죽음이라는 두 얼굴을 함께 바라보고 선 노년까지. 각자 서 있는 곳에서 인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독자에게 시인은 “삶에 쫓겨 놓쳐 버린 청춘의 발자국과 당신의 첫 문장”을 다시 한번 찾아보자며 작은 손을 내민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짧은 시들을 함께 읽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 당신만의 “버킷 리스트”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래, 살아 줘서 고맙다고.